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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일모도원 (日暮途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프로복싱이 한창 인기를 끌던 1970~80년대 오일룡이란 방송 해설위원이 있었다.

차분한 목소리로 "왜냐면 말이죠"를 연발하면서 정곡을 찌르던 그의 명쾌한 해설은 당시 많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가 해설할 때 자주 쓰던 말들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선수들이 잔 펀치를 무수히 맞고 서서히 무너져 갈 때 즐겨 쓰던 말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자주 들은 말은 '해는 지는데 갈 길은 멀다'였다.

경기가 다 끝나가는데도 우리 선수가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을 때 그는 으레 이 표현을 썼다. 吳씨의 이같은 비유들은 한때 성대모사가 뛰어난 코미디언 최병서씨가 흉내내면서 잠시 유행어가 될 정도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해는 지는데 갈 길은 멀다'는 말은 『사기』의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에 나오는 일모도원(日暮途遠)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초(楚)나라 사람 오자서는 평왕(平王)때 아버지와 형이 죽임을 당하자 외국으로 도망친다.

후일 오왕 합려(闔慮)에 의해 발탁돼 초나라 수도를 점령하게 된 오자서는 이미 죽은 평왕의 묘를 파헤쳐 시신에 3백번 매질을 해 복수했다. 한때 신하였던 사람으로서 지나친 것이 아니냐는 옛 친구의 지적에 오자서가 했다는 말이 일모도원이다.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어 도리에 어긋난 짓을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나이가 들었지만 아직 할 일이 많다'는 긍정적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보통은 시간이 촉박할 때 쓴다.

5년 임기의 마지막 해에 접어든 김대중대통령(DJ)정권의 요즘 모습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떠올리고 있다.

특히 며칠 전 연두 기자회견을 한 DJ 자신도 이 말을 뼈저리게 절감했을 것이다. 뭐 하나 제대로 해놓은 것은 없고, 해야 할 일은 아직 태산 같은데 시간이 다 지나가 버렸으니 그야말로 일모도원 격이다.

더구나 그의 표현처럼 '정신 못차릴 정도로' 측근 관련 비리 게이트가 연달아 터지니 굳이 레임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맥이 다 빠졌을 것이다. 마지막 라운드를 뛰는 복싱선수처럼 몸과 마음이 완전히 지쳐버린 대통령의 모습에서 국민들이 그의 건강을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해가 지고 갈 길이 멀어도 나라 일을 복싱의 12라운드처럼 끝낼 수는 없다. 지금이라도 그가 꼭 해야 하고,또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게 뭔지는 누구보다 DJ 자신이 잘 알 것이다.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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