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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벤처 이대론 안된다(중)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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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인 A사는 나스닥 상장을 위해 2000년 뉴욕에 현지법인을 세우고 의욕적으로 미국 시장 개척에 나섰다. 서울대 출신 10여명의 연구원들이 개발한 소프트웨어 기술이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도 대단했다.

하지만 이 회사는 지난해 15명의 직원을 정리하고 현지법인을 폐쇄했다. 국내에서 뽐내던 기술이었지만 현지에선 전혀 눈길을 끌지 못했고, 마케팅이나 영업도 먹혀들지 않아 2년여간 매출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이 회사 K사장은 "전략이나 시장분석도 없이 우물안 개구리 시각으로 자만했던 게 실패 요인"이라고 털어놨다.

많은 국내 벤처기업들이 '국내 최고, 세계 최초 기술'이라는 현란한 수식어를 쓰며 회사를 자랑한다. 하지만 이런 기술들이 과연 세계 수준인지 검증된 경우는 거의 없다.

소빅컨설팅의 김동렬 대표는 "국내 시장에서는 먹힐지 몰라도 진짜 실력으로 겨루는 세계시장에서 경쟁력 없는 벤처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경쟁력은 바닥, 눈높이는 천장=중소기업청이 지난해 8월 벤처기업으로 지정된 7천6백81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세계 유일'의 기술을 갖고 있다는 기업이 7백개(9.1%)나 됐다. '세계 최고 수준과 동일한' 기술을 가졌다는 곳도 2천7백개(35.3%)가 넘었다.

과연 그럴까. 기술력을 해외기업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우선 정보기술(IT) 기업의 향연장이라는 미국 나스닥 등록기업 수를 보자. 태극기를 들고 나스닥에 입성한 국내 기업은 세곳. 그나마 두루넷과 하나로통신은 대기업이고, 벤처로는 미래산업이 유일하다.

특허 등 해외의 지적재산권을 갖고 있는 곳도 7.5%에 불과하다. 절반 정도가 세계적 기술력을 가졌다는 자부심과는 거리가 있다.

해외 투자자들의 국내 벤처에 대한 시각도 싸늘하다. 미국계 투자회사인 SSBT의 국내 파트너인 한세투자자문의 임주화 이사는 "한국에서 투자할 수 있는 분야는 반도체와 CDMA이동통신 분야 정도에 불과하며, 벤처기업들은 검토 대상이 아니다"고 말했다.

메릴린치.슈로더 등도 코스닥의 벤처기업은 기술분석이나 투자가능성 분석을 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 기술+마케팅+기획으로 시장 뚫어야=전문가들은 초기의 벤처기업 육성 단계에서 벗어나 이제는 개별 기업의 경쟁력 강화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KTB의 강택수 이사는 "우리 벤처기업에 중요한 것은 기술과 마케팅.기획 등이 결합된 경쟁력"이라며 "시장개척 능력을 키우기 위한 인력양성도 시급하다"고 말했다.

실제 몇몇 벤처기업들은 차별화한 기술과 마케팅으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위성방송용 셋톱박스 제조업체인 휴맥스는 틈새시장을 파고 드는 마케팅으로 유럽의 대리점 시장을 뚫어 지난해 2억달러의 수출을 달성했다. 기술은 '하이테크'가 아니었지만 기획과 마케팅으로 성공한 예다.

또 아이디스는 감시카메라 16대분의 영상을 2개월까지 저장할 수 있는 장비를 개발,미국 항공우주국(NASA)과 유니버설스튜디오 등에 공급했다.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인 지니텍은 다국적기업인 ASM에 기술을 제공하고 로열티를 받는 계약을 했다.

김종윤.권혁주 기자

*** 경쟁력 키우려면

로커스는 올해 역점사업의 하나로 다른 벤처기업과 역할을 나눠 기술개발을 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몇몇 벤처가 분야별로 연구한 결과를 합쳐 제품을 개발하고, 제조와 마케팅은 또 따른 기업에 맡긴다는 구상이다.

핀란드의 노키아는 헬싱키 근교에 '오타니에미 파크'라는 벤처 단지를 만들었다. 노키아와 기술 제휴를 한 2백여 벤처들이 이곳에서 연구개발을 한다. 그 성과는 바로 노키아의 신제품 개발에 활용된다. 미국의 거대 제약회사 머크도 신약개발을 담당하는 벤처들과 제휴,'벤처 R&D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다.

국내에도 벤처간 강력한 협업 체제를 꾸민 곳이 있다. 경기도 용인의 바이오벤처단지 바이오메드파크가 대표적이다. 14개의 벤처가 신약개발을 위해 모였으며, 입주업체들이 공동 출자해 마케팅 및 연구 기획 전문회사까지 만들었다.

삼성경제연구소 박용규 수석연구원은 "벤처를 포함한 기업끼리의 공동 R&D에 대해 정부가 세제혜택 등을 통해 지원하면 경쟁력 강화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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