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지도] 2. 미다스의 손 '영화 프로듀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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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비트''태양은 없다''무사'를 만들며 김성수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조민환(39) 프로듀서는 지난 14일 서울 강남에 번듯한 영화사를 차렸다. 1995년 '꼬리치는 남자'로 시작한 7년여의 '종업원' 생활을 끝내고 영화사 대표가 된 것. 물론 프로듀서 역할엔 변함이 없다.

그의 변신은 한국영화의 볼륨 확대에 힘입은 바 크다. CJ엔터테인먼트와 싸이더스가 지분 참여 형식으로 자본금을 댔다. 조대표의 경험과 아이디어에 돈을 투자한 것이다. "이제 만들고 싶은 영화를 할 수 있어 좋아요. 앞으로 SF멜로나 SF액션극을 만들 겁니다." 그의 말이다.

이번엔 영화세상 안동규(44)대표. 그는 85년 장선우 감독의 '서울예수' 연출부를 맡으며 영화계에 입문, 93년 영화사를 설립했다. 그가 느꼈던 80년대는 이렇다. "정말 제 이름을 제작자로 올린 영화 한편을 만들고 죽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안대표가 영화계에 뛰어든 80년대 중반만 해도 영화사는 20여개에 불과했다. 당시 대부분의 영화사는 한국영화 제작보다 외국영화 수입으로 수지를 맞춰 갔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의욕이 넘쳐도 영화사를 차린다는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

조대표와 안대표의 나이 차는 다섯살에 불과하지만 영화계에 들어온 배경은 이토록 다르다. 한국영화의 상업적 기획개념을 선도적으로 접목한 신씨네 신철(44)대표의 회고 또한 안대표와 마찬가지다. "절망스러웠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신대표는 지난해 대히트한 '엽기적인 그녀'를 제작한 주인공으로 90년대 한국 상업영화의 성장을 주도해왔다. '편지''약속''은행나무 침대'등의 화제작을 통해 우리 영화계에서 프로듀서의 시대를 개척한 일등공신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다. 그만큼 영화계가 달라진 것이다.

프로듀서는 누구인가. 일반인들은 방송사 PD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영화에선 개념이 다르다. 영화의 모든 것을 기획.조정한다. 투자자 유치부터 마케팅 전략까지 영화의 전과정을 아우르는 총책임자다.

요즘은 별로 색다를 게 없는 직종이지만 사실 10여년 전만 해도 우리 영화계에 프로듀서란 자리는 거의 없었다. 고작해야 감독을 보조하는 일이 다였다. 영화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감독이요, 또 그들을 기용한 '전주'(錢主.제작자)였다.

한국 영화계에 프로듀서란 말이 사용된 최초의 영화는 92년 '결혼 이야기'다. 영화가 끝나고 올라가는 자막에 '오정완'이란 이름이 프로듀서로 처음 소개됐다. 물론 오씨 이전에도 1세대 프로듀서로 분류되는 신철.안동규.유인택씨 등이 활동했지만 프로듀서란 타이틀이 공식 등장한 것은 바로 이 때다.

프로듀서의 성장은 한국 영화계의 발전과 맥을 같이 한다. 87년 영화법이 개정돼 영화사 설립의 독과점 구조가 깨지고, 88년 직배 외국영화가 들어오면서 급변하기 시작한 영화환경의 '적자'(嫡子)인 셈이다.

이들은 한국 관객들의 감수성을 적극 반영하는 상업형 기획영화를 주로 만들어냈다. 돈이 없어도 아이디어가 좋고, 또 이를 영상으로 옮기는 노하우가 있으면 영화를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줬던 것.

한국 영화계의 프로듀서들은 독립된 영화사를 차린 시기에 따라 3세대로 분류할 수 있다. 80년대 후반 영화 기획.홍보사 등을 거쳐 성장한 1세대, 그들이 차린 영화사와 인연을 맺으며 90년대 중반께 독립한 2세대, 그리고 최근 한국영화의 성장과 함께 왕성하게 진입한 3세대가 그것이다.

이들 프로듀서는 한국영화의 산업적 기틀을 다졌다. 지방 극장주들이 선수금을 내고 만들었던 우리 영화의 제작 관행에 대기업.벤처.금융자본을 끌어들이며 영화산업의 안정된 제작구조를 일궈냈다. 지난해 50%에 가까운 시장 점유율을 기록한 데는 이들의 역할이 가장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지난 10여년을 통해 한국영화도 '볼 만하다'(1세대),'재미있다'(2세대),'봐야 한다'(3세대)는 식으로 공감을 끌어낸 게 가장 큰 공적으로 꼽힌다. 문예.멜로영화 중심이던 우리 영화의 표현영역도 크게 넓혔다. 제작자나 감독의 개인적 취향을 넘어 관객의 기호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대대적인 마케팅으로 우리 영화의 대중성과 경쟁력을 높여왔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다. 감독이 뒤로 물러나고 프로듀서가 정면으로 나서면서, 즉 영화의 흥행이 '지상명제'로 부상하면서 작가주의 영화의 침체가 가속화했다.

영화사 봄의 오정완(38) 대표는 "우리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한국영화도 볼 만하다는 인식을 주고 할리우드에 근접하는 제작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현재 그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된 것으로 봐도 좋을 것 같다.

앞으로의 과제는 안정된 시스템 구축과 장르의 다양화다. 수익이 안 나면 이내 빠져나갈 수 있는 투기적 영화자본을 계속 잡아두기 위해선 수익모델을 지속적으로 찾아야 한다. 물론 '색깔'있는 작품을 통해 영화계의 스펙트럼을 확장할 책임도 함께 떠안고 있다. 돈을 많이 번다고 우수한 프로듀서는 아니지 않은가.

박정호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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