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200m 화선지에 한국과 아프리카 담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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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호 10면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인천공항 로비는 세로 1m50㎝, 가로 300m에 달하는 화선지로 ‘도배’가 됐었다. 그 화선지엔 목포에서 서울을 거쳐 임진각에 이르는 1번 국도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당시 베를린시 뵐메스르도프 구청갤러리도 마찬가지였다. 라인강의 물길과 독일의 문화를 그려낸 수묵 담채가 같은 크기로 청사 바람벽을 장식했다. 그리고 2010년 6월. 이번엔 케이프타운에서 ‘넬슨만델라베이’라 불리는 포토엘리자베스, 더반, 요하네스버그를 거쳐 프리토리아에 이르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혈맥 ‘2번 국도’다. 아프리카의 이국적 풍광과 신화를 수묵화로 그리고 있는 주인공은 주영근(44) 화백. 월드컵이 열리는 나라의 길과 풍경, 거리의 모습과 문화적 상징을 엄청난 분량의 화선지에 풀어내고 있다.

2010 남아공 월드컵 앞두고 다시 초대형 그림 준비한 주영근 화백

-왜 월드컵 그림인가.
“그림을 늦게 시작했다. 군대 다녀와서 여러 번 재수 끝에 홍익대 미술교육원에서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나이 서른이 됐을 무렵 ‘평생 즐겁게 그릴 수 있는 주제가 뭘까’ 생각했다. 1996년부터 5년간 1번 국도를 따라 오가며 우리 산천의 모습을 그려왔는데 마침 2002년 월드컵이 열리게 됐다. 축구와 그림을 너무 좋아하는지라 자연스럽게 월드컵과 연관이 됐다.”

-길을 따라 다니며 그림을 그리는 게 쉽지 않아 보인다.
“미술학원 강사, 인쇄소 직원부터 막노동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 그렇게 돈을 모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 여기저기 다니느라 힘이 들지만 그때마다 ‘김정호 선생은 그 옛날에 지도도 만들었는데’라고 마음을 다잡곤 한다.”

-이렇게 큰 그림을 주로 그리는 이유는.
“풍광을 그리다 보니 웅장한 화면 맛이 좋더라. 보통 종이를 세 장 합친 화선지 삼합 장지에 그리는데 종이 사이즈만 세로 1m45㎝, 가로가 2m15㎝다. 그림이 크니 전시공간도 커야 했고 큰 곳에서 하다 보니 화제도 됐다.”

-남아공은 언제 다녀왔나.
“2007년 20일간 혼자 둘러봤다. 하루 13시간씩 차를 타고 이동했다. 카메라로 4000여 컷을 찍고 동영상으로 찍은 60분짜리 테이프가 7개다. 이 자료를 토대로 지금까지 하루 15시간씩 그림을 그리고 있다(그의 화실 벽에는 당시 찍은 사진들이 빼곡했고 한쪽 면에는 커다란 영사막이 걸려 있었다).”

-단순한 풍경 그림은 아니다.
“아프리카의 풍속화를 그리기도 하고 거대한 나무와 기차도 그렸다. 남아공의 나라꽃과 우리의 홍매를 결합한다든지 양국 문화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 가지 상징을 담으려 했다. 올해가 백호의 해인 점을 감안해 흰 호랑이와 남아공 국기의 3색을 연결하기도 하고, 아프리카를 상징하는 영양을 집어넣기도 했다. 이런 그림을 통해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이번에도 분량이 상당하다.
“세로 1m50㎝짜리 화선지를 이어 붙이면 200m에 달한다. 가로 30㎝, 세로 20㎝짜리 소품도 2010장을 목표로 현재 1700장쯤 그렸다. 현지에 가서도 계속 그릴 생각이다.”

-재료 값도 만만치 않을 텐데.
“주변에서 도와주는 분들 덕분에 어렵지만 계속 그릴 수 있다. 월드컵이 열리는 나라의 중심 길을 그리겠다는 것은 나 자신과의 약속인 만큼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견딜 생각이다.”

-남아공에서 전시는 어떻게 되나.
“현재 한 고등학교 교장과 이야기 중이다. 가능하다면 한·일 월드컵과 독일 월드컵 때 그린 초대형 그림도 함께 가져가 전시하고 싶은데 남아공에서 마땅한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다. 전시 및 수송 비용도 현재로선 문제다.”

-앞으로 계획은.
“2014년 월드컵은 브라질에서 열린다. 브라질은 축구의 나라 아닌가. 이번엔 펠레의 흔적을 따라가며 그가 남긴 축구의 흔적을 그려내고 싶다. 이미 자료조사는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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