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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내편 네편, 선과 악 … 역사와 세상을 보는 반쪽짜리 시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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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역사는 단순한 ‘지나간 일의 기록’만이 아닙니다. 역사를 일러 ‘승자의 기록’이라 폄하하는 목소리도 있고, 무턱대고 옛날이 좋았다는 시각 또한 경계해야 하지만 역사는 미래로 향하는 나침반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어제에 빚지고 있고, 내일은 역시 오늘에 기대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 케케묵은 사료를 벼려 값진 교훈을 길어낸 책을 소개합니다.

 독사(讀史)
김동욱 지음
글항아리
376쪽, 1만5000원

역사 책 서평집 같기도 하고, 시사칼럼집 성격도 띄고, 역사 상식 뒤집기인 듯도 싶은, 여러 얼굴을 가진 책이다. 그러니까 부제 ‘역사인문학을 위한 시선 훈련’처럼 아리송한데 물론 좋은 의미이다. 재미와 생각거리가 넘치고, 어지간히 역사책을 읽었다 자부하는 이라도 “어, 이랬나”싶은 대목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 이야기를 보자.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어를 모르는 독일인 가정교사에게 몽테뉴를 맡겨 당시 상류사회의 언어인 라틴어 조기 교육을 시켰다. 부모는 물론 하녀까지 몽테뉴에게는 라틴어를 쓰도록 한 결과 몽테뉴는 여섯 살 때 원어민 수준의 라틴어를 구사하게 됐다고 한다. 문제는 정작 프랑스어를 잘 할 수 없어 명문 학교에 들어가서도 왕따가 되었다는 점이다. 지은이는 몽테뉴의 위대한 사상과 문필력은 조기 교육의 산물이었지만 대신 주변과 융화되지 못한 채 아웃사이더로 외로운 삶을 살아야만 했다고 지적한다.

‘꽉 막힌 소통이 가져온 비극적 결과’에서는 1970년대 이후 평균 연령이 70세를 웃돌았던 구 소련 공산당 서기국의 제론토크라시(Gerontocracy·노인정치) 사례와 함께 동독의 마지막 지배자였던 호네커의 ‘키친 캐비닛(주방내각)’ 이야기를 전한다. 동독의 외교정책은 정치국 회의나 공산당 중앙대회 같은 공식기구보다는 호네커와 그의 측근인 에리히 밀케와 귄터 미타크의 사냥모임에서 결정되곤 했다. 이들은 2차 대전 이전부터 공산주의 운동을 하면서 나치와 목숨을 건 투쟁을 했던 ‘화려한 과거’를 내세웠지만 결국 새로운 시대 흐름에 부응하지 못해 몰락의 과정을 걷게 됐다는 것이 지은이의 설명이다.

그런가 하면 병자호란 때 청의 전승비인 ‘삼전도비’의 비문을 짓는 과정에 빚어진 웃지 못할 일도 들려준다. 당대의 문장가들이 청 태종을 칭송하는 글쓰기를 모두 꺼렸다. 이 와중에 “문자로써 저들의 마음을 달래어 사세가 더욱 격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란 인조의 간곡한 부탁을 받은 이경석이 결국 ‘대청황제공덕비문’을 썼단다. 하지만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이경석은 훗날 명분에 얽매였던 송시열 등에게서 “오랑캐에 아부해 부귀영화를 오래 누린 파렴치범”으로 몰렸다. 지은이는 이를 두고 이념 과잉과 ‘선과 악’의 이분법이 넘쳐나는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짚어낸다.

지은이는 서양사를 전공한 현역 기자. 그래선지 역사의 갈피를 뒤져내는 솜씨도 뛰어나고, ‘오늘’과 연결짓는 시각도 나름 신선하다. 여기에 관련 책을 함께 소개하는 친절함이 더해져, 흥미로우면서도 뜻깊은 책이 됐다.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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