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대관령의 중공군 (99) 한 점만을 노린 중공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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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선으로 향하는 중공군 대열이 압록강을 건너고 있다. 북진하던 국군과 연합군을 막아 전선을 경기도까지 밀고 내려왔던 중공군은 1951년 5월 막대한 병력을 동원해 강원도 인제와 홍천 지역에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중앙포토]

적은 전선 전면에 54만 명의 병력을 집중시켰다. 만주에도 예비 병력 75만 명 정도가 주둔하고 있었으니, 잔뜩 물을 머금은 시커먼 먹구름이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거세게 밀려 내려오고 있는 셈이었다.

전선은 1951년 4월 말에 접어들면서 일단은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달 초에 벌어졌던 중공군의 공세가 멈칫한 틈을 타서 국군과 연합군은 5월 초에 들어서면서 반격을 시도할 작정이었다. 이 작전에는 미 10군단에 배속된 국군 5·7사단과 국군 3군단의 3·9사단, 국군 1군단의 수도사단과 11사단 등 6개 한국군 사단이 참가했다. 그러나 진격 도중 적이 중동부 전선으로 움직인다는 정보가 잡혔다. 특히 전선에서 붙잡힌 중공군 포로를 통해 중공군 54만 명과 북한군 20만 명이 재차 공격을 서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미 8군은 당장 북쪽으로의 진격을 멈췄다. 5월 13일에는 소양강과 설악산을 잇는 선에 새로운 방어선을 마련하면서 작전 전체를 공격에서 방어로 전환했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5월 16일 오후 4시30분부터 공격을 벌였다. 이른바 ‘공격준비사격’이다. 공격에 앞서서 적의 지휘부와 통신시설, 보급소 등을 타격하는 행동이다. 각종 포를 동원해 정밀하면서도 대단위로 사격을 가하는 것이다.

육군본부가 펴낸 『중공군 의지를 꺾은 현리~한계 전투』라는 전사에 보면 중공군은 5월의 공세에서 이 공격준비사격을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펼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미 10군단 지역에 배속된 국군 5사단과 7사단이 그 예봉을 맞이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1시간여에 걸친 강력한 공격준비사격을 마친 뒤 공격을 개시해 2시간 반 만에 국군 7사단의 방어선을 돌파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포격으로 통신선이 마비된 7사단은 방어선이 돌파당한 사실을 인접한 한국군 9사단과 그 지휘부인 3군단에 알리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7사단을 지휘했던 미 10군단도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시 중공군은 전투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국군을 노렸다. 그들은 공격준비사격을 가하기 전 선견대(先遣隊)라는 관측부대를 보내 아군의 지휘소와 관측소 등 주요 시설을 파악하는 게 관례였다. 특히 당시의 공세에서는 과거보다 더 면밀하게 국군의 취약지점을 사전 정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공군은 보급에서 차질을 빚었던 상황이었다. 물자와 화력이 아무래도 참전 초기에 비해서는 떨어졌다. 그 약점을 그들은 ‘선택과 집중’으로 해결한 모양새였다. 가장 취약한 상대인 국군 7사단의 방어지역을 사전에 치밀하게 정찰한 뒤 화력을 집중시켜 선제공격을 가함으로써 방어선 전체를 뚫을 요량이었던 셈이다.

중공군은 아예 미군의 방어지역은 바라보지도 않은 것이다. 그 효과는 아주 크게 드러났다. 게다가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북진 작전을 펴던 국군이었다. 시스템과 운용 능력에서 연합군에 비해 떨어지던 국군은 공격에서 방어로의 전환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공격에서 방어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진지 재편성, 부대 배치와 통신 선로 매설 등의 준비가 따라야 했다. 국군은 그 작업을 마저 끝내기도 전에 중공군의 벼락같은 일격을 맞은 것이다.

7사단 지역은 방어하기가 비교적 수월한 곳이었다. 앞에 소양강이 있었고, 적이 강을 건너면 다시 경사각이 60도가 넘는 절벽 같은 지역을 올라야 했다. 게다가 중공군은 공격 직전 4일 동안 연합군의 공중폭격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7사단은 무너졌다. 중공군이 바로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국군은 진지를 이탈했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적군의 정밀한 공격준비사격에 놀랐고, 뒤이어 통신이 두절되면서 지휘통제 체계가 마비됐기 때문이었다.

7사단의 동쪽으로 붙어 있는 곳은 국군 3군단의 9사단 방어지역이다. 먼저 공격을 당한 7사단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의 일격으로 휘청거리고 말았다. 그 많은 중공군의 병력은 한곳으로 모였다. 이른바 ‘일점집중(一點集中)’이다. 7사단 전면에만 중공군 6개 사단이 덮친 것이다.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이란 게 다른 내용이 아니다. 그저 무기 없이 사람 머릿수로만 밀고 내려오는 것도 아니다. 한곳에 집중적으로 소나기처럼 병력과 화력을 퍼붓는 것이다. 당하는 아군 입장에서 보면 중공군은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나서는 군대다. 유령 같기도 하고, 마치 허깨비를 보는 듯한 착각에도 빠져든다. 국군은 그렇게 밀리기 시작했다. 5월 중순의 힘겨웠던 밤들은 그렇게 찾아 왔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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