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특별 대담] 공노명 前외무·박재규 前통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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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새해 남북관계는 남북 양측의 내부사정과 미국의 대테러전쟁 후속조치 등 국제정세로 인해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남측은 대통령선거와 지방자치선거 등 정치일정과 월드컵.아시안게임을 치러야 하고, 북측은 김일성 주석 출생 90주 행사와 아리랑축제 등 내부결속을 다지기 위한 움직임에 벌써부터 부산하다.

이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답방은 물론 2000년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6.15공동선언의 이행에는 적신호가 켜진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1일 신년 공동사설에서 주적론 포기를 비롯한 기존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남북장관급 회담 수석대표를 지낸 박재규(朴在圭)전 통일부장관과 공노명(孔魯明)전 외무장관의 대담을 마련, 2차 남북 정상회담 전망을 포함한 2002년 남북관계와 북.미관계 기상도를 진단했다.

▶朴전장관:올해 남북관계는 북.미관계와 북한의 내부 사정을 감안할 때 현재의 소강상태가 지속되지는 않을 겁니다. 미국은 북한의 대량 살상무기에 대해 강하게 경고하면서도 북한과의 조건없는 대화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또 북한도 반테러 국제협약 추가 가입과 핵 관련 연구소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 허용 등 일부 전향적 자세를 보이고 있어 조만간 대화가 재개될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으로서는 2월에 김정일(金正日)위원장의 환갑, 4월에 김일성(金日成)주석의 90회 생일을 맞는 만큼 어떻게든 가시적 경제성과를 올리려 할 것입니다. 지금은 북측이 행사 준비에 매달려 있지만, 행사가 끝나면 남북회담에 임할 것으로 봅니다.

▶孔전장관:저도 소강상태가 오래 가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북측이 아쉬운 입장이므로 식량지원을 받기 위해서라도 대화에 나설 것입니다. 다만 당국대화가 이뤄진다 해도 실무회담 선에서 진행될 가능성이 크고, 장관급회담은 열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북측이 매우 계산적인 만큼 우리도 적절한 수준에서 상호주의를 적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북측도 기존 합의사항의 실천에 좀더 진지해질 것입니다. 그동안 북측을 대화의 마당에 끌어내기 위해 약속 이행을 안해도 묵인한 적이 많았습니다만, 이제는 현실적인 접근을 해야 합니다.

*** 9.11 테러 후 北변화 주목

▶朴:남북한의 내부 사정을 고려해 볼 때 군사분야 회담은 소강상태에서 벗어나기 어렵겠지만, 북측이 경협 관련 회담에는 적극 임할 것이고, 장관급회담도 재개되리라 봅니다. 북한이 심각한 경제난 때문에 마냥 회담을 연기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죠.

▶孔:개인적으로는 월드컵 개최 일정에 맞춰 경의선을 개통하면 좋겠다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중국 관광객들이 경의선을 타고 서울에 올 수만 있다면 북한은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에 크게 기여하는 셈이고, 이에 따라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이미지도 크게 개선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중국 정부와 함께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朴:경의선 연결과 관련, 클린턴 행정부 말기에 북.미관계가 좀더 진전이 됐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됩니다. 그랬더라면 북한이 경의선 연결에 적극성을 보였을 겁니다. 북한이 경의선 연결사업에 착수할지는 대미(對美)관계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孔:북한이 먼저 자세를 바꿨으면 합니다. 북한은 지금까지 '워싱턴을 통해 서울을 움직이겠다'는 태도를 보였는데, 앞으로는 서울을 통해 워싱턴을 움직이겠다는 식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약자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약자가 강자를 움직이려면 상대의 환심을 사는 행동을 먼저 취해야 합니다. 북한이 대미관계 개선을 원한다면 남측과의 관계 개선은 물론 경의선 연결사업에 적극성을 보여야 합니다.

▶朴:중국.러시아는 한반도 평화를 원하고 있고, 북한이 무력도발에 나서면 대북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입니다.

북한이 9.11 테러 이후 각종 반테러 국제협약에 가입의사를 밝히는 등 미국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는 태도를 취한 것은 이런 분위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불필요하게 북한을 자극하지 않고, 북한이 미국의 대량살상무기 비확산 노력에 협력한다면 양국 관계의 실마리는 풀릴 겁니다.

▶孔:북한이 먼저 나서야 합니다. 미국이 원하는 것은 '대화를 위한 대화'가 아니라 '실천과 검증'입니다. 말로만 해서는 안됩니다. 북한이 검증에 적극 응해야 체제의 안전도 기할 수 있습니다.

▶朴:金위원장도 경제난 극복을 위해서는 남한과의 경협을 적극 추진해야 하고, 그래야만 외국투자도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중국식 모델은 아니더라도 개혁.개방의 필요성은 인식하고 있습니다. 지난 55년간 유지해온 체제를 하루 아침에 바꾸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변해야 산다는 점을 북한 지도부는 명심해야 합니다.

▶孔:적대관계에 있던 남북한의 두 정상이 만난 것은 의미가 큽니다. 앞으로 정상회담을 정례화하면 남북관계가 크게 발전할 것입니다. 북측에 말하고 싶은 점은 金위원장의 서울 답방시 수십만 인파의 환영을 기대한다든가, 답방에 따른 대가를 문제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동안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겠다는 자세로 서울에 올 때 참다운 돌파구가 열릴 것입니다. 사고의 전환 없이는 남북관계의 물꼬를 틀 수 없습니다.

*** 금강산 사업 실리맞게 조정

▶朴:6.15 남북 공동선언에는 金위원장의 서울 답방이 '적절한 시기'에 하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사실 북측이 답방을 '언제' 하겠다고 정확히 얘기한 적은 없습니다.'적절한 시기'는 두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우선 서울 답방 분위기입니다. 환영 분위기에서 金위원장이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확신이 설 때 가능할 것입니다. 다음은 북한에 대한 미국의 체제보장과 경제지원입니다. 두가지가 이뤄져야 안심하고 서울에 올 수 있다고 봅니다.

▶孔:이 조건을 충족시키기란 쉽지 않습니다. 북한이 미국으로부터 체제보장과 경제지원을 얻어내려면 미국과의 대화에 나서야 합니다. 특히 IAEA 사찰을 수용해 미국의 의구심을 풀어야 합니다. 지난해 말 북한이 경수로사업 관계자 20명을 남한에 보내 원자력시설을 돌아보는 조치를 취한 것은 매우 고무적입니다.

▶朴:6.15선언 전후 북한은 우리에게 식량.비료.전력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북측이 우리를 경쟁.대결 상대에서 협력 파트너로 인식하기 시작한 겁니다. 남북은 필요한 때 서로 도와야 합니다.

특히 식량.비료 등 인도적 지원은 우리 경제에 큰 무리가 가지 않는 범위에서 미.일과의 사전 협의 없이 추진해도 무방합니다. 북측을 진정으로 도울 수 있는 나라는 남한밖에 없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신뢰구축에 도움이 됩니다. 다만 전력지원은 기술적 문제, 경수로 건설 진척도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합니다.

▶孔:인도적 지원도 규모가 커지면 전략적 고려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국회에 사전 통보해 마찰없이 추진해야 합니다. 인도적 지원이라도 국민의 지지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점을 북측에 이해시켜야 합니다.

대북지원에 대한 지지를 얻는 과정에서 이산가족면회소 설치 등 가시적 성과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북한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남한의 일방적 대북 전력지원은 미국의 대북 중유지원이 갖는 인센티브를 상쇄시킬 수 있는 만큼 한.미.일 정책조정그룹(TCOG)의 협의를 거쳐야 합니다.

*** 대북정책 초당적 협의를

▶朴:현재 중단 위기에 처한 금강산 관광사업은 계속돼야 합니다. 이 사업은 북한 金위원장이 남북 화해.협력의 첫 사업으로 시작한 것이어서 상당한 애착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것이 중단되면 金위원장의 체면이 손상되고 남북관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孔:저는 이 사업이 너무 허황된 것이라고 판단해 처음에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이것이 깨지면 남북관계에 악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시장경제 원리에 입각한 경제성 있는 사업으로 조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사업이 지속될 수 있습니다. 북한과의 재협상을 통해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朴:남북관계가 올해 정치행사에 휘말려들어서는 안됩니다. 현 정부는 남은 임기에 지난 4년간의 대북정책을 검토.보완해 다음 정부에 인계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북측과의 합의사항 가운데 실천에 옮기지 못한 것은 북측을 설득해 쉬운 과제부터 풀어나가면서 잘 마무리해야 할 것입니다.

▶孔:대북정책은 초당적인 협의과정이 필요합니다. 설사 여야간에 합의점을 찾지 못하더라도 일단 협의를 거치면 정책 수행이 원활해질 겁니다. 여하튼 북한을 고립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대북 포용정책을 보완해 나가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 첫 단계로 대북정책을 국내정치에서 분리시키는 작업부터 해야 합니다.

정리=이동현 기자

<대담자 약력>

*** 공노명 前장관

▶함북 명천 출생(70)

▶서울대 법대 졸업

▶주 소련대사

▶외교안보연구원장

▶주 일본대사

▶외무부장관

▶동국대 일본학연구소장 겸 석좌교수(현재)

*** 박재규 前장관

▶경남 마산 출생(58)

▶미 페어레이디킨슨대 정치학과 졸업

▶경남대 총장

▶한.러 친선협회장

▶한국대학총장협회장

▶통일부장관

▶경남대 북한대학원장(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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