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암 종정 추도사] 보광 동국대 불교대학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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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삼가 향 올려 고하옵니다.

온 나라에 서설(瑞雪)이 내린 섣달 그믐날 큰스님의 열반 소식은 청천의 벽력과도 같았습니다. 어찌하여 그렇게도 바라시던 종단의 화합과 나라의 발전을 미처 보시기도 전에 저희들을 버려 두고 훌쩍 원적(圓寂)의 머나먼 길을 떠나고 마십니까? 큰스님께서는 가고 옴이 없으시겠지만, 미혹한 중생들에게는 생사가 분명히 둘이며, 큰스님을 보내는 이별의 괴로움이 가야산을 진동하고 있습니다.

지난 해 신사년 신년법어에서 "모두 함께 본 고향에 가기를 기원한다"고 하시면서, "꽃 빛은 찬란해도 지고야 말 것, 이 세상 뉘라서 죽지 않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신사년에 열반에 드실 것을 예고하셨으나 우매한 저희들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신 바와 같이 신사년을 하루 남겨둔 그믐날 해인사를 떠나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26세 때에 당시 독립운동가였으며, 근세 한국불교의 중흥조인 용성(龍城)스님의 문하였던 인곡(麟谷)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여 봉암사에서 청담, 성철, 자운, 향곡 스님들과 4년의 긴 용맹정진결사를 마치셨습니다. 이후로는 전국의 각 선원과 제방의 조실스님을 찾아가 거침없는 법거량을 벌였으므로 "혜암스님은 조실을 가르치러 다니는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으며, 자그마한 키에 깡마른 법체였으나 안광이 유달리 빛나서 호랑이도 도망갔다는 일화 등은 오늘날에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큰스님의 위법망구(爲法忘軀)의 구도정신과 철저한 수행력은 종단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평생 장좌불와(長坐不臥)와 오후불식(午後不食)과 용맹정진(勇猛精進)을 게을리 하시지 않으셨으며, 70년대 후반부터는 성철 스님과 함께 가야산을 지키시어 오늘날의 해인도량을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종단이 풍전등화격일 때인 94년과 98년에는 상경하시어 종단의 개혁을 주도하셨으며, 99년에 제10대 종정으로 취임하시어 오늘날 종단의 위상을 반석 위에 올려놓으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동국대학교가 일산에 불교종합병원을 건립한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건강이 좋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현장을 방문하시어 격려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이제 큰스님을 보내는 저희들은 누구를 의지하여 수행의 나침반으로 삼아야 할 것이며, 눈 덮인 가야산에는 새봄이 올 때까지 긴 겨울을 어떻게 견디어야 하겠습니까? 큰스님! 열반의 즐거움에 오래 머물지 마시옵고, 다시 사바로 오시어 갈 길 몰라 헤매는 우매한 중생들을 제도하여 주옵소서.

불기 2546년 1월 4일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학장

보광(普光) 분향 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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