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병욱 칼럼] 개각은 양보다 질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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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무슨 무슨 게이트란 것이 꼬리를 물고 있다. 부패의 썩은 냄새가 도처에 진동한다. 권력의 핵심부도 예외가 아니다. 임기가 아직 1년여가 남았는 데도 대통령의 레임덕이 어느 때보다 일찍 시작되는 느낌이다. 내년에 줄을 이을 대사(大事)들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한숨이 절로 난다.

*** 정치.지역색 脫色할 계기

새해에는 정치일정만 해도 상반기말 지자체 선거, 8월 재.보궐선거,연말 대통령선거가 줄을 잇는다.전세계인의 축제인 2002 한.일 월드컵도 잘 치러야 한다. 국내외 경제상황은 아직 엄혹하다. 잠시도 방심할 처지가 아니다.

이 모두 정부의 뛰어난 관리.통제능력을 요구하는데 막상 공직사회는 잇따른 독직사건과 정치권 줄서기 등 내부 균열로 흔들리고 있다.

대통령의 인기가 떨어지고 임기말이 가까워지면서 리더십에 누수현상이 생기는 건 불가피하다. 그러나 국가관리를 제대로 못할 정도로 심화되는 건 나라를 위해서도 피해야 한다.

지금 우리의 상황은 'IMF관리 사태'로 가는 것을 막지 못했던 1997년의 재판을 보는 것 같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정치적으로 마음을 비우고 특단의 대책을 세워 통제불능의 사태로 가는 것을 막지 않으면 안된다.

우선 金대통령은 남은 임기를 원만하게, 가급적이면 성공적으로 마무리짓는 것 이상의 정치적 야심을 버려야 한다. 정권을 재창출하겠다든가, 누구는 절대로 안된다든가 하는 의중이 표출되기라도 하면 여야 및 집권세력 내부 관계는 지금보다 더 심한 대결로 치닫게 될 것이다.

선거를 앞둔 여소야대 상황에서 내부 분열과 대야 관계 악화는 정부가 설 땅을 좁게 할 뿐이다. 이미 金대통령은 집권당 총재직을 사임하고 국정에 전념하겠다는 결심을 표명했다.

그런데도 대통령이 새천년민주당과 완전히 거리를 두겠다는 뜻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정치적으로 마음을 비우고 중립을 분명히 해야 야당의 협력과 '선량한 관리자'란 국민의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래야만 집권세력 내부와 공직사회도 효율적으로 추스를 수 있다.

대통령의 정치적 의도는 인사에서 나타난다. 내년초 총리를 포함한 대폭 개각을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한다 한다 하며 미뤄왔던 '인사쇄신'이 되기 위해선 지역색.정치색을 얼마나 확실하게 빼느냐가 중요하다.

"개각 등 인사가 너무 잦아 일을 못하겠다"는 공직사회의 불만을 봐도 역시 양보다는 질이다. 정당간 공조를 위해 입각한 정치인이 물러나는 건 당연하나 퇴진압력을 받았던 검찰총장.국정원장.국세청장 등의 거취가 더욱 관심거리다.

이런 인물들이 대부분 쇄신 대상에서 빠지면 정부개편의 폭이 아무리 커도 인사가 '쇄신'됐다는 평가를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개편의 폭이 좀 좁더라도, 예컨대 정치색이 없는 훌륭한 인물이 총리가 되고 심재륜(沈在淪)고검장 같은 강직한 인물이 검찰총장으로 기용된다면 상당히 기대를 받을 것이다.

잇따라 터지고 있는 각종 의혹사건을 말끔히는 아니라도 그런대로 납득할 수 있게 처리하지 않고선 정부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거나 공직기강을 추스르기는 불가능하다. 이 사건 처리는 모두 검찰의 손을 거쳐야 한다. 검찰의 독립적이고 엄정한 사건처리가 관건이다.

검찰의 독립성에 대한 신뢰 없이는 권력주변의 비리를 제대로 파헤치기도 어려울 뿐더러 설혹 제대로 수사를 해도 정치적 의심과 논란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더구나 정치권 비리를 파헤치기 위해 야당쪽에 수사의 칼을 대면 야당 탄압이란 아우성이 쏟아지게 된다. 검찰이 지금같이 신뢰를 못받는 상황에선 사실과 관계없이 탄압논란의 수렁에 빠져 수사마저 제대로 하기 어렵다.

*** 검찰 독립성 꼭 확보해야

현 검찰수뇌진용으로는 엄정한 검찰권 행사의 기반이 되는 검찰 독립성에 대한 신뢰는 회복할 수 없다. 공권력의 상징인 검찰 지도부의 인사쇄신 없이 정부의 인사가 쇄신됐다는 평가를 받을 수 없는 이유다.

신뢰를 회복한 검찰이 각종 의혹사건을 金대통령 임기 중에 제대로 처리하는 것은 정치보복이란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의혹사건 처리가 제대로 안돼 결국 다음 정권까지 가게 되면 정치보복 얘기가 나올 게 뻔하지 않은가.

앞으로 1년여가 국가 리더십의 공백기가 되지 않도록 하는 정치지도자들의 지혜와 책임감이 아쉽다.

성병욱 <중앙일보 고문.고려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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