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일왕발언, 역사인식의 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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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아키히토(明仁)일본 국왕이 23일 자신의 선조인 간무(桓武)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임이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돼 있다고 언급, 일본 황실과 백제의 혈연적 관계를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이는 1984년 히로히토(裕仁)전 국왕이 "지난 6~7세기 일본 고대국가 형성 때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큰 역할을 했다"는 발언보다 구체적이며 역사 인식에서 훨씬 앞서 있다는 평가를 할 만하다.

특히 한.일 양국간에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역사 왜곡 문제가 월드컵 공동 주최라는 국제적 행사에까지 마찰을 일으켜 감정적 대응을 야기할 소지마저 있는 시점에서 일왕의 언급이 나왔다는 데 그 의미가 크다. 또 21세기 동아시아 경제 발전을 선도하기 위한 투자협정 체결 등 상호간의 교류.협력 분위기를 띄울 수 있는 시점에 나온 발언이어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지금까지 양국은 주요 역사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중재가 불가능할 정도로 극명한 시각의 차이를 드러내며 평행선을 달려왔다. 고대사에 대한 일왕의 엊그제 발언에 대해서까지 양국 여론이 상이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바로 실증적 본보기다. 한국측이 이 뉴스를 크게 다룬 반면 일본 언론은 극소수 신문을 제외하곤 거의 침묵을 지키고 있다.

두 나라 지도자들은 몇년에 한번씩 한.일 역사 공동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에 합의해 왔으나 이는 언제나 정치적 행사로 끝났다. 우리들이 눈여겨볼 만한 진전이라곤 세미나와 간담회 몇차례가 고작이었다. 일왕의 발언을 계기로 공통의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한 양국간 협력 증진은 진지한 논의의 출발에서 이뤄져야 한다.

극우적 또는 극좌적 시각을 모두 배제하고 사실과 사료를 중심으로 평가하고 현장 답사 등을 통해 기탄없이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성숙돼야역사 평가가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역사에 대한 우월감이나 일제시대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면서 일본을 토론의 장으로 이끌어 가야 일본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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