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국정원이 살인범 사업 들러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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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14년여 만에 수지 金 피살 사건의 범인으로 구속기소된 남편 윤태식씨가 그동안 국정원과 정치인 비호 아래 벤처사업을 했으며 상당액의 로비 자금이 정치권에 제공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부부싸움 끝에 일어난 단순 살인 범죄를 국가 공권력과 범인이 공모해 '여간첩의 남편 납북기도 사건'으로 조작하고 은폐하려 했던 것으로만 알려졌던 수지 金 사건이 정치권 로비 자금 의혹으로 새 국면을 맞은 것이다.

금감원은 단순히 생체인식 보안기술을 개발한 벤처기업 '패스 21'의 실질적 소유주인 尹씨의 횡령과 자본금 가장 납입 혐의만 고발했다. 그러나 등록도 되지 않은 상태의 이 회사 주가가 경쟁 기업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치솟은 데다 회사 규모가 비상식적으로 비대해져 주위에서 모두 의아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尹씨 회사의 급성장은 국정원 납품설이 결정적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결과적으로 국정원이 범인의 조작.은폐뿐 아니라 사업의 들러리 역할까지 해 온 셈이다. 이 과정에서 尹씨는 전직 장관을 회장으로 영입하는가 하면 국회의원들과 친분을 맺고 정치자금을 제공해 왔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거명되고 있는 의원들이 대부분 여야 실세들이어서 수사 결과가 특히 주목거리다.

결국 국정원은 살인범을 숨겨주는 차원을 넘어 범인과 동업한 셈이나 마찬가지라는 의혹이 생겨난다. 과연 그 거래가 비리나 부정없이 투명하게 진행됐는지도 의문이다.

국가 최고 정보기관이 정치적 목적으로 사건을 조작.은폐한 것도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살인범의 사업까지 후원해 왔다면 이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과연 이런 부도덕한 국가기관이 존재할 필요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수지 金 사건은 추악한 공권력이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줬다. 조작 과정이 드러나고 은폐에 관여한 국정원.경찰 고위 간부가 구속됐으나 수지 金 사건 수사는 이제부터 시작이나 다름없다. 검찰은 尹씨의 배후 비호 세력과 정치권 로비 의혹을 철저히 파헤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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