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폴 발레리 '바닷가의 묘지'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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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비둘기들 거니는 저 고요한 지붕이

소나무와 무덤돌 사이에서 파닥거리네;

거기 올바른 정오가 불꽃들로 바다를

직조한다, 항시 다시 시작하는 바다를!

신들의 고요 위에 오래 머무는 시선은

오,명상의 끝에 얻는 보상이런가!

(중략)

바람이 인다… 살려고 해봐야지!

가없는 대기가 내 책을 열었다 닫는다,

파도는 물안개로 부서져 바위에 용솟음친다!

날아올라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

무너뜨려라, 파도여! 무너뜨려라 흥겨운 물결로

작은 돛배들이 모이를 고 있는 이 고요한 지붕을!

-폴 발레리(1871~1945) '바닷가의 묘지' 중

전체 24연의 장시 중 처음과 끝 연을 뽑았다. 해가 남중하는 '올바른 정오', 지중해변 마을 세트는 시인의 삶이 시작하고 끝난 곳.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묘지. 지난 여름, 나는 거기 가보았다. 죽음의 공간이 '항시 다시 시작하는' 생명과 맞닿아 있었다.

소나무와 무덤돌 사이로 보이는 바다에 떠있는 배들이 지붕 위를 거니는 비둘기들 같다. 생명은 다하여 땅 속으로 돌아가지만 덧없는 삶은 여전히 계속된다. 삶은 죽음으로 인하여 오히려 고양되느니. 바람이 인다. 창조의 책장 속에서 덧없음이 승리하는 시간, 살려고 노력해야겠다.

김화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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