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카불에선] 라마단의 미덕은 남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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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땅거미가 서서히 내려 희뿌연 모랫바람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쯤이면 카불은 낮에 드러냈던 번잡한 풍경을 지우기 시작한다.

버스 지붕 위와 꽁무니에 가득했던 그 많던 사람들, 볼품 없는 물건들을 늘어놓았던 시장의 좌판들, 시꺼먼 매연을 뿜어대며 질주하던 택시들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라마단(이슬람 금식월).전란 뒤의 어지러운 저녁거리를 매일 깨끗이 청소하는 것은 바로 라마단이었다.

오후 5시의 카불에는 빵을 파는 노점상만 덩그러니 거리에 남는다. 시민들은 이곳에 줄지어 감자와 당근을 썰어 넣은 납작한 빵을 산다. 해뜨기 전 새벽기도 때 시작, 12시간 이상 지속하는 단식을 깨는 첫 끼니를 20원짜리 거친 빵으로 때우는 것이다.

대개는 봉지에 서너개의 빵을 담아간다. 식구들의 몫이다. 그리고는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간다. 라마단 기간에는 해가 지자마자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게 전통이다.

통역은 9년 전 내전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시내의 식당과 호텔엔 가족들과 함께 저녁식사하는 사람들이 넘쳐났고 라마단 축제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지금은 전깃불도 안들어오는 토담집과 빵 말고는 함께 할 것이 없다.

라마단 한달 동안 모든 관공서와 기관은 오후 1시에 문을 닫는다. 오전 4시쯤부터 시작되는 하루 다섯번의 예배와 물 한 모금도 허용치 않는 수행에 대한 배려다.

거리에는 평소보다 많이 털을 벗긴 양.염소가 통째로 걸린다. 형편이 좀 나은 사람들이 친척이나 이웃에게 고기를 사 나눠주기 때문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대목을 맞는 것이다. 이 한달 동안엔 남을 욕하거나 싸우지 않는다고 한다.

이방인에게 뭔가를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때가 절어있는 손으로 빵 조각을 떼어 내미는 사람도 많았다. 15일이면 라마단도 끝이다.카불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른 모스크바에는 성탄절 장식이 시내를 뒤덮고 있었다.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는 동양에서 서양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전쟁은 여전하다.

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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