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M' 국제 정세 전문가 분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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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9.11 테러사건은 미국과 러시아간 협력관계를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지난달 열렸던 미.러 정상회담(11월 13~15일)에서 양국정상은 강력한 반(反)테러 공동협력과 함께 전략핵의 대폭적 감축에 대해 인식을 같이 했다.

그러나 중요한 현안이었던 ABM협정 개정문제에 대한 서로의 견해차를 좁히지 못함으로써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ABM협정에서 6개월 후 탈퇴한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미.러관계가 밀월에서 대립관계로 바뀌고, 미국의 MD계획을 반대하는 러시아와 중국 사이의 새로운 연대가 강화돼 국제질서에 신냉전 구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다. 미국의 이번 탈퇴선언은 고도의 협상전략의 일환으로 개정문제를 둘러싼 미.러간 줄다리기가 최종단계에 접어든 것을 의미한다.

러시아는 ABM협정 개정문제를 전략핵무기 감축을 위한 강력한 대미 협상카드로 활용하고 있다.

ABM협정 개정과 관련해 러시아는 다음 두가지 점을 확실히 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첫째, 미국의 MD가 러시아의 핵전력을 무력화할 정도의 수준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추진하는 MD를 전면적 성격이 아닌 소수의 핵미사일만을 요격할 수 있는 제한적 체제로 묶어두고 싶어 한다.

둘째, 가능한 한 낮은 수준에서 미국과의 전략핵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대폭적인 상호 전략핵 감축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인구 1억5천만명에 국내총생산(GDP)이 3천억달러에 불과한 러시아가 강대국으로서 국제적 영향력을 유지하는 길은 핵전력밖에 없다. 그러나 러시아의 경제력으로는 현재 수준의 전략핵 균형을 유지할 방법이 없다.

핵전력 유지와 경제적 부담능력의 타협점을 러시아는 1천5백기 수준으로 보고 있다.

MD구축을 위해 ABM협정의 개정을 필요로 하는 부시 대통령은 러시아의 입장을 감안, 전략핵의 대폭적 감축문제를 협상카드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미국은 약 2천기 수준으로 삭감하자는 입장이다.

ABM협정 탈퇴선언이 효력을 발생하기까지는 아직 6개월이 남아있다.

이 기간 중 미.러간에는 ABM협정 개정과 전략핵 감축을 둘러싸고 지금보다 훨씬 첨예하면서 지루한 힘겨루기가 전개될 것이다.

러시아는 최대한의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중국 등 국제사회와 반MD 연대를 강화하는 모습도 보일 것이다.

따라서 일시적으로는 국제관계가 경색될 가능성도 있다.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은 초강대국 지위를 잃은 러시아에 미국과의 전략핵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대신 ABM협정의 수정을 요구할 것이다.

러시아로서는 결국 이를 뿌리치기 어려울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간의 명운을 건 기(氣)싸움이 주목된다.

협상의 접점은 러시아가 주장하는 1천5백기와 미국이 주장하는 2천기 사이에서 찾아지지 않을까 싶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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