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국왕들 세종⑨ 훈민정음 창제정신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 표면적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하나는 왕조 개창의 정당성을 온 천하에 천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훈민정음을 반포하기 1년 전인 세종 27년(1445) 4월
세종은 이미 재위 1년(1419) 대마도 수호(守護:대마도 도주)에게 준 글에서 “우리 태조 강헌대왕이 용비(龍飛)하셨다”라는 표현을 써서 오래전부터 조선 건국을 용비(龍飛)의 결과로 보고 있음을 드러냈는데, 이것이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이 직접 지은 어제(御製)에서 밝힌 그대로다. 즉 ‘어린 百백姓셩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면서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들어 모든 사람이 쉽게 익혀 날마다 편안하게 하려고 할 따름이다’라고 말했다. 세종은 백성이 문맹일 경우 가장 큰 문제가 옥사(獄事)라고 생각했다. 문자를 모르는 백성들이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 7명이 세종 26년(1444) 2월 언문 제작을 반대한 상소 중에 바로 이 대목이 있었다.
“(언문 제작과 관련해) ‘형살(刑殺)에 대한 옥사(獄辭)를 이두문(吏讀文)으로 쓴다면 문리(文理)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한 글자 차이로 혹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다. 지금 언문으로 그 말을 직접 쓰고 읽어서 듣게 한다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다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지만….” (
최만리 등은 이두를 아는 자도 매를 견디지 못해 그릇 항복하는 자가 많으니 피의자가 글자를 안다고 옥사가 공정하게 처리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각종 소송 문서를 읽을 줄 안다면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적어질 것이란 점에서 최만리 등의 반대는 ‘반대를 위한 반대’였다. 당시 법률문서는 한문과 이두가 섞여 있었는데 이두 또한 한문 못지않게 어려웠다.
예를 들어 의금부의 수사 기록인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깊은 철학적 바탕 위에서 나왔다. 일제가 조선어 말살정책의 시동을 걸던 1940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된
“하늘과 땅의 도는 ‘한 음양과 오행(一陰陽五行)’일 따름이니, 곤(坤)과 복(復) 사이가 태극(太極)이 되고, 움직임과 고요함의 뒤가 음양이 된다. 무릇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삶을 누리는 무리들이 음양을 버리고 어찌하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의 소리가 다 음양의 이치가 있지만 돌아보건대 사람들이 살피지 않았을 뿐이다. 이제 정음을 만드는데 처음부터 지식으로 꾀하고 힘으로 찾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소리를 따라 그 이치를 다할 따름이니 이치가 이미 둘이 아니거늘 어찌 하늘과 땅과 귀신과 더불어 그 씀(用)을 구하지 않겠는가. 정음 28자는 각자 그 형상을 본떠서 만들었다.” (
훈민정음에서 하늘을 ‘ㆍ’로, 땅을 ‘ㅡ’로, 사람을 ‘l’로 표현한 것은 음양과 태극 이론에 따른 것이었다. 또한 그 형상을 본떠서 목구멍을 ‘o’으로, 이(齒)를 ‘ㅅ’으로, 입을 ‘ㅁ’으로 형상화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 데는 혼란스러운 한자음을 정리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이를 위해 세종은 인간의 구강(口腔)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는 언어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전 세계 어느 언어도 갖지 못한
그러나
현재의 한글맞춤법 통일안은 영어의 B와 V, P와 F, R과 L 등을 구분해 표기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많은 언어학자의 깊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순음 ‘ㅁ·ㅂ·ㅍ·ㅃ’ 아래에 ‘ㅇ’을 더하여 만든 ‘ㅱ·ㅸ·ㆄ·ㅹ’ 등이 순경음인데 이 중 B를 ‘ㅂ’로, V는 ‘ㅸ’으로 적고, P는 ‘ㅍ’로, F는 ‘ㆄ’으로 적는 식으로 정리하면 현행 한글맞춤법 통일안으로 적을 수 없는 발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생각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장래에 국어학자는 물론 외국어 전문가, 역사학·언어학 등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이 종합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는 주제다.
또한 세종은 동아시아의 보편 문자인 한자와 훈민정음의 공존을 추구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정신으로 돌아가 일제의 잔영을 걷어내고 우리의 언어정책을 세계화 추세에 발맞춰 크게 개혁할 때다. 그것이 세종의 애민 정신을 현재에 되살리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