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에세이] 지식사회의 줄서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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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한때 대권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던 전직 장관이자 현직 국회의원 한 사람이 무심코 던진 말은 기자를 당혹스럽게 했다.

"교수중에 쓸모있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는 말에 "어떻게 그런 쓸모없는 학자만 만나고 다녔느냐"고 되받기는 했지만,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학자가 정치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마당에 정치인의 평가에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나름의 독자적인 논의구조를 가진 지식사회를 정치인의 필요에 따라 평가했으니 이 정치인의 말은 '무지의 소치'로 돌려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남의 탓만 하기에는 교수 사회가 과연 떳떳하다고만은 할 수 없다. 이같은 비하발언에 학계의 지나친 정치화가 빌미를 준 것이 아닌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체력이 떨어져 연구에 소홀해지기 쉬운 40대 중반에 이르면 일부 교수들은 '교내 작은 정치'와 '여의도 큰 정치'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한다. 큰 정치를 선택한 경우 자문을 해주고 정파에 줄을 대거나, 더러는 정치인을 대신해 '독한'글로 '증오의 정치'를 확산시킨다.

이 정부의 가장 큰 실책 중에 하나가 '지식인 정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정부를 대변했던 지식인이 지나치게 정파성에 의존함으로써 학계는 물론 사회전체의 보편적 동의를 얻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이 때문에 지식사회는 DJ를 축으로 확연히 갈라졌다.

"천기를 누설하겠다"며 뭔가 권력 핵심의 내밀한 얘기를 자랑하거나 "DJ는 이유없이 싫다"라며 공.사석에서 감정을 공공연히 드러내기도 했다. 햇볕정책을 둘러싼 한 토론회에서 "DJ의 임기가 끝나면 이 논쟁은 소멸될 것"이라는 어떤 교수의 논평도 이런 증오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런 증오의 결과는 지식사회의 자살이었다. 독립적이어야 할 지식사회가 정치사회에 종속돼 자율성이 위협받게 되었다. 또 지식사회 존립에 필수적인 '공론의 규율'도 사라진지 오래다. 이것은 결국 지식의 '보편성 상실'이라는 중대한 위기로 이어졌다. 지식이 특별히 대접받는 것은 그것의 보편성 때문이다. 누가의 지식이든 최소한 공론의 규율을 거친 것이기 때문에 신뢰를 보낸다.

교수들의 정치화는 지식인이 가진 보편성과 정치적 이익을 맞거래함으로써 가능하다. 지식의 정치적 종속은 바로 이런 거래가 도를 넘게 이뤄졌음을 의미한다. 물론 학자가 정치나 현실에 참여는 것 모두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공공재'로서 지식을 생산.유통해야 할 교수들이 지역.이념.기득권 여부에 따라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증오의 정치'를 대변하는데 있다는 점이다.

벌써 차기 대선 후보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누구는 어느 캠프, 누구는 어느 후보 등등'과 같은 줄서기 소문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이 기존의 증오를 청산하기 보다 지식사회 내에서 피해의식과 패권이 확대재생산되는 악순환으로 빨려들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다. 교수들을 만나는 자리마다 '증오의 지식'을 걱정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김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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