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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지도자들 나섰지만 그리스 불끄기 쉽지 않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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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정치·경제적으로 혈맹이 아니라면 화폐동맹은 존속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을 통해 그는 상품과 노동력·돈이 자유롭게 오가면서, 깐깐한 재정 집행과 강력한 중앙은행이 동시에 존재하는 ‘개방 경제’를 옹호했다. 튼튼한 중앙은행과 엄격한 재정 집행은 강력한 통화의 ‘두 기둥’과 같다. 둘은 마치 2인용 자전거에 올라탄 것처럼 손발이 맞아야 한다.

지금 나랏빚 문제로 힘겨운 싸움을 하는 유로화 권역(Eurozone)에도 힘세고 독립적인 중앙은행이 존재한다. 그러나 재정에 금이 간 데다 정치적 단합이 신통치 않아 골치를 앓고 있다.

유럽을 한 몸으로 묶는 데 기틀이 됐던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회원국의 부채와 적자가 적정선을 넘지 못하게 했다. 살림살이가 허약한 나라가 튼튼한 회원국에 기대어 무임승차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지금 그리스에서 벌어지는 것과 같은 위기 사태를 방지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방어벽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경제가 안정적이라면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뼈대’도 밥값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곳곳에 충격파가 널린 현실에서 이는 무너지기 쉬운 골조일 뿐이다. 경기가 널뛰기를 해도 소극적인 정책만 허용되기 때문이다. 사실 유로화가 출범한 뒤 처음 10년간 핵심 국가와 주변국 모두 조약의 제한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세입이 쪼그라들거나 사회보장비 지급이 증가하는 등 나라 살림이 곤란해지면 이런 규정 위반은 자연스레 일어나게 마련이다. 이는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의 분석만 봐도 알 수 있다. 2008년 금융위기 뒤에 나타난 선진국의 경기부양책 중에서 80%가 재량으로 남발됐다는 것이다. 이런 대응책이 나쁜 건 아니지만, 재정을 위협해 적자를 부추기고 과도한 빚으로 나라를 위험에 빠트린다는 게 문제다.

유로권은 신용등급이 떨어지면서 국가부채 이자가 늘어 고통받는 회원국 때문에 최근 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 외부 지원과 함께 재정 질서를 되찾기 위한 묘수가 없다면 그리스의 부채는 만기 연장에 실패해 결국 부도 운명에 놓일 수밖에 없다. 설령 외부 도움이 있다 해도 부도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재정을 건전하게 되돌리는 일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이럴 때 재정의 허리띠를 졸라매는 게 대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임금과 소득’이 하락해 국민의 고통을 가중시킨다. 정치인도 이를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유로권 국가가 직면한 한계는 미국의 주 정부가 당면한 문제와 비슷하다. 사정이 안 좋을 때 화폐 가치를 떨어뜨리면 수출 증가 등으로 숨통이 트일 수 있지만 달러라는 단일화폐를 쓰기 때문에 여의치 않다. 미국도 마스트리히트 조약과 비슷하게 주 정부의 장기 적자를 용인하지 않는다. 따라서 최근의 금융위기 같은 대형 충격이 밀려들면 주 정부의 재정 정책도 경기에 따라 바뀌게 된다.

그러나 유럽과 달리 미국의 연방 시스템은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2개의 핵심 안전판이 있다. 첫째는 적자를 단호하게 관리하는 중앙정부의 힘이다. 둘째는 유연한 노동시장이다. 반면 유로권엔 경기 변화에 대응할 탄탄한 중앙조직이 없다. 또한 유로권의 오랜 목표인 노동 유연성은 언어와 법, 이질적 규제로 한계를 드러냈다.

최근 유로권 지도자들은 마스트리히트 시스템을 다시 논의할 뜻을 내비쳤다. 조약의 내용을 개별 회원국 차원에서 보다 탄력적으로 적용하는 쪽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를 적용하는 문제도 생각보다 복잡하다. 더욱 강력한 정책이 필요한 회원국도 있지만, 경제회복 국면을 감안해 이런 게 필요 없는 나라도 있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충격이 왔을 때 맞설 수 있도록 경제 성장기에 유로권 차원에서 돈을 쌓아 놓는 일이다. 이를 ‘안정화 세금(stabilization tax)’이라고도 부른다. 이런 작업은 재정의 중앙집권화를 유발하지만, 부분적으로만 용인하면 된다. 이 경우 유로권 회원국이 자국 사정에 맞게 효과적인 재정 정책을 펼 수 있을 것이고, 유로의 회생에 도움이 될 것이다.

유로존이 탄생할 때 깐깐한 재정 집행은 대들보처럼 인식됐다. 그러나 현재의 위기에서 살아남으려면 ‘규제와 유연성’의 조합을 만들어 내야 한다. 재정 중앙화 등으로 회원국은 재정 주권을 완전히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현실을 각오해야만 통화동맹이 존속할 수 있다. ⓒ Project Syndicate

마이클 스펜스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