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8명 2년째 아파트단지 주변 야간순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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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서울 강남구 수서6단지 아파트촌 근처에 가면 매일 밤 특이한 행색의 사람들과 마주치게 된다.

휠체어를 타거나 다리를 절며 수신호용 경광봉과 랜턴을 들고 마을 곳곳을 누비는 순찰대 8명이다.

스스로를 '청소년 지킴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요즘처럼 추운 날에도 오후 8시만 되면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대부분 영구임대아파트에 사는 생활보호대상자들로, 하반신 지체 등 크고 작은 장애를 겪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점이다.

생활이 여유롭지도 않고 몸도 불편한 사람들이지만 매일 오전 2시까지 여섯시간 동안 밤길을 돌며 청소년 선도나 거리 청소 등의 봉사활동을 해온 지 16개월째다.

동사(凍死) 직전의 취객이나 지하철기지로 뛰어들던 치매노인을 극적으로 살리기도 했고, 가출 청소년을 집에 데려다준 일도 여러번.

처음엔 "대가를 바라는 것 아니냐" "장애인들이 뭘 하겠다고…"하며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던 주민들도 이제는 이들을 '마을의 파수꾼'으로 부르고 있다.

이들이 이 일을 시작한 건 지난해 8월.

결손가정이 많아선지 청소년들의 비행이 잦았던 6단지를 향해 이웃 주민들이 "가난한 동네는 아이들도 사납다"고 손가락질하는 것을 보고 당시 청년회장 방대인(44)씨가 "우리가 바꿔보자"고 제안했고 상당수가 장애인인 청년회 회원들이 동참했다.

이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순찰을 돌면서 문제 청소년 12명의 명단을 파악해 '지킴이 수첩'에 적어 특별관리에 나선 것.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먹는 청소년들을 친형처럼 타이르자 차츰차츰 달라졌다.

대원 권오성(44.3급 하반신 지체장애)씨는 "하지만 두세명은 아직도 싸움질이나 술.담배를 하고 있어 걱정"이라고 했다.

어이없는 일도 종종 당했다.

단장 方씨는 술에 취해 길에서 자는 사람을 귀가시키려다 "네가 뭔데 깨우느냐"며 시비를 걸어오는 통에 세차례나 파출소 신세를 졌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보람된 일을 하신다"고 격려하며 자신을 풀어준 경찰관과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됐다.

6단지 관리사무실을 함께 쓰는 이들의 '지킴이 사무실'은 가끔씩 주민들이 과일.떡 등 먹거리를 들고 오는 동네 사랑방이 됐다.

며칠 전엔 크리스마스 트리 한개가 선물로 왔다. 단지 부녀회장 조순자(56)씨가 보낸 것.

조씨는 "경찰서에 가면 술을 먹고 싸운 사람 중 절반이 영구임대아파트 사람이었는데 이젠 몰라보게 변했다. 밤거리도 편안해졌다"고 했다.

하지만 일이 고되선지 처음 16명이던 대원이 지금은 절반으로 줄었다. 남은 여덟명 중 다섯명은 낮에는 조그마한 가게에서 장사를 하거나 회사에 다니면서도 밤에는 어김없이 거리로 나서는 철인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1급 장애인인 대원 박상원(45)씨는 "지역사회 봉사를 통해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성호준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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