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중앙 시평] 역설의 정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정치의 묘미는 역시 역설(逆說)이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정치인들과 정치판을 비난하면서도 자나깨나 정치 이야기인가 보다. DJ의 당 총재직 사임 이후 돌아가는 정치풍향이 바로 그러한 역설의 묘미를 느끼게 한다.

IMF위기 상황에 힘입어 집권했던 DJ는 '개혁'이 일차적인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주도한 개혁정치에 대한 끊임없는 공세와 인기하락으로 그는 총재직에서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 안깨지는 지역정당 구도

경제나 대북정책처럼 국가가 나아가는 기본방향을 바꾸는 작업이 성공하려면 그것을 떠받쳐주고 방어해주는 중심 정치세력이 있어야 한다. 문제는 이같은 개혁 중심세력이 지역중심의 정당간 대결 구도 속에서는 결코 형성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정치판이 호남이냐 영남이냐로 짜여 있고 그 안에서 당 총재가 공천권이라는 생살여탈권을 행사하는데 어떤 국회의원이 돈키호테처럼 당론과 다른 '개혁'이나 '보수'를 원한다고 나설 수 있겠는가?

나라의 앞길이나 민생과는 상관없이 여당이 개혁을 내세우든 보수를 내세우든 야당은 무조건 그 반대로 나갈 수밖에 없도록 구조가 짜여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역정당 구도에서 상생(相生)의 정치를 찾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일 수밖에 없다. 물론 스스로 지역감정의 포로가 돼있는 유권자들도 정치인들이 민생은 외면하고 싸움질만 한다고 비난할 자격이 없다.

그런데 DJ는 그동안 태생적인 한계 때문이었는지 이러한 정치판을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두고서 개혁을 밀고 나갔다. IMF위기 직후와 같은 비상상황에서는 개혁의 명분이 그런대로 먹혀 들어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경제가 나아지면서 끊임없는 정치공세가 시작되고 인기도 하락했다. 이는 결국 예견된 일이었고 그는 당 총재직을 사임했다.

그가 물러나자 민주당 쇄신위원회가 가동되고 상향식 공천제도의 원칙을 확정했다고 한다. 만일 이것이 제대로만 실현된다면 지역중심 보스정치는 더 이상 힘들어질 것이다.

이제 보스의 눈치보다 당원과 국민의 눈치를 보아야 될 판이니 국회의원들의 관심은 자연히 윗사람의 생각보다는 민생과 정책중심으로 확실하게 옮아갈 것이고 사안에 따라 교차투표도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비선거제까지 도입된다면 지역정당구도로 왜곡된 대선 후보의 대표성이 상당히 회복되고 국민들과 정당간의 일체감도 강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DJ의 당 총재직 사퇴는 21세기에 걸맞은 '나라의 틀'을 세우는 데 발목을 잡아왔던 40년 묵은 지역정치 구도를 허물기 시작하는 획기적인 전기가 될 것이다. DJ가 하려고 했던 개혁정치의 기반이 DJ가 정치판을 떠나기 시작하자 마련되는 역설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만일, 어디까지나 만일, 이러한 조치들이 민주당의 체질개혁으로 변화되고 그러한 새로운 체제에서 대선 후보가 선정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대통령이 총재직을 사임하도록 공세를 펼쳐온 야당이 이제는 수세로 몰릴 것이고 게다가 이중의 부담까지 짊어져야 될지도 모른다. 이것이 또한 제2의 역설이다.

*** 野도 체질 개혁 불가피

먼저 민주당이 당 체제를 민주화하는데 한나라당도 그에 준하는 변화를 모색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것이냐 하는 점 때문이다.

또 하나는 한나라당의 이념적 입장의 재정립이 불가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한나라당은 제로섬의 지역정당 대결 구도에서 민주당이 외치는 개혁에 우리는 보수다라고 외치면서 무조건 반대해도 어느 정도 면죄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이 체질개혁해서 지역정당 구도가 탈색되기 시작한다면 이제 반대만 외치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교원정년 문제에 대한 야당의 입장에 국민들이 어떻게 반응했나를 음미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국민들은 바꾸어야 되는 것을 제대로 못 바꾸는 무능력에 분노하는 것 이상으로 시계추를 무조건 옛날로 되돌려놓겠다는 것에 대해서도 분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의 정치에도 역설은 존재하고, 그래서 그나마 미래에 희망을 걸어보는 것 아니겠는가?

尹永寬(서울대 교수,미래전략硏 원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