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독립문이 서 있는 서울 서대문 밖 모화관(慕華館) 앞에서 펼쳐진 별기군(別技軍)의 훈련 모습.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곳에서 문화적 열등자로 깔보던 일본식 군사훈련이 펼쳐졌다는 사실은 중국이 따라 배워야 할 우월한 문명의 지위를 이미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881년 5월 모화관 앞마당에는 진귀한 구경거리가 펼쳐졌다. 초록빛 군복에 긴 총을 멘 낯선 모습의 군인 100여 명이 일본교관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의 구령에 맞춰 신식 군사훈련을 받는 모습이었다. “개혁의 첫걸음이 우리 육군사관의 손에 의하여 개시된 것도 수년 동안 권유의 결과이다.” 일본공사가 본국에 보고한 바와 같이 어찌 보면 별기군은 1876년 이래 조선에 대해 ‘개화와 독립의 옹호자’라는 가면을 쓰고 접근한 침략자 일본이 거둔 개가였다.
“군사 중 장건한 자들에게 일본의 무예를 배우게 해 왜별기(倭別技)라 부르니 그 이름부터가 해괴합니다. 무가(武家) 자제와 유생 소년들이 윗도리를 벗어젖힌 채 열을 지어 서서 오랑캐 상놈들에게 머리 숙여 경례하게 해 수치심을 품게 하니, 이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구식군대에 대한 차별대우로 임오군란이 터지기 두 달 전 좌의정 송근수가 올린 상소처럼 그때 이 땅의 사람들은 군제개혁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한 세기 전 나라를 지킬 근대적 군사력을 갖추기보다 열강 사이에서 줄타기로 연명하려 했던 조선왕조는 망국의 슬픈 역사를 쓰고 말았다. 나라를 지키는 힘은 지배의 대상인 신민(臣民)들의 왕조에 대한 충성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민임을 자각한 병사들의 국민국가에 대한 자주적 애국심에서 발휘되는 것이라는 사실이 겉만 근대 병기로 무장했던 별기군이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뼈아픈 교훈 아닐까?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