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첼시양(孃)에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그대가 쓴 글 잘 읽었습니다. 당신 나라에서 발행되는 격월간지 '토크(Talk)' 최신호(11.12월호)에서 그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외국에 있다는 게 힘들다. 매일 나는 일종의 반미(反美)감정과 마주치게 된다. 어떤 때는 학생들로부터, 또 어떤 때는 신문의 칼럼니스트로부터 그런 느낌을 받는다.어떤 때는 반전(反戰)시위자들로부터 그런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 9 ·11테러후의 反戰 시위

미국인으로 이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겁니다. 외국에서라면 더욱 그렇겠지요. 그대의 글 곳곳에 스며있는 고뇌의 흔적에 마음이 아픕니다. 오죽 답답했으면 성조기를 들고 반전 집회장에 뛰어들어 "뉴욕 테러의 희생자들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외쳤겠습니까.

33년 전 그대 부친은 지금 그대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 학생이었습니다. 당신 부친은 영예로운 로즈장학생으로 영국 옥스퍼드대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하는 촉망받는 청년이었습니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그 시절 그대 부친은 '68세대'의 신성한 '의무'로서 반전시위에 앞장섰습니다.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대는 똑같은 장소에서 반전시위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9.11 테러의 충격이 그 정도로 컸다고 해야겠지요.세계무역센터가 맥없이 무너지던 그 순간 그대는 바로 근처에 있었고 그 끔찍한 광경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대가 "내가 자란 이 나라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자각에 충격을 받은 나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고 쓴 것은 당연할 겁니다. 그런 애국심으로 도처에서 들려오는 반미.반전의 목소리를 듣는 그 심정이 오죽하겠습니까.

9.11 테러 발생 한달째가 되던 날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일부 이슬람국가에 왜 그토록 심한 반미감정이 있다고 보는지 기자가 물었습니다. 55세가 되도록 3주 이상 외국에 머물러본 적이 없는 그대 나라 대통령의 대답입니다.

"미국에 대한 이같은 몰이해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사람들이 우리를 싫어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강한 인상을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의도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 잘 알기 때문에 그런 말을 믿지 않는다."

그대는 명문 스탠퍼드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옥스퍼드대에서 국제관계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미국의 지식인입니다.

반미주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미국이 테러의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당신 나라 대통령의 말대로 미국은 그토록 좋은 의도를 가졌는데 세상은 어째서 그걸 몰라주는 걸까요.그 원인을 탐색하고 고민하는 것은 지식인의 의무라고 봅니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로 현재 뉴욕대 교수인 토니 주트 박사는 '뉴욕 리뷰 오브 북스' 최근호(11월 15일자)에 '미국과 전쟁'이란 글을 기고했습니다. 그는 미국의 오만함과 일방주의를 반미감정의 원인으로 꼽으면서 "수백만명의 외국인들이 어째서 미국을 싫어하는지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이번 전쟁은 장기적으로 미국에 득이 될 수 없다"고 썼습니다.

*** 반미감정 이해할 수 있어야

어제 아침 우리 신문에는 카불의 간호학교 여학생 이야기가 실렸습니다(11월 29일자 8면). 스물한살로 그대와 동갑인 샤미드는 5년 만에 학교로 돌아와 열악한 환경에서 학업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대가 미국을 선택해 태어난 게 아니듯 샤미드 또한 원해서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대가 누리는 풍요와 샤미드가 겪는 고통은 단지 운명의 차이일까요.

"미국은 다른 나라들이 미국을 어떤 나라로 보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자만심을 버리고 전쟁이 아닌 방법으로 우호세력을 늘리고 적대세력을 줄여가야 한다." 그대 부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모교인 조지타운대에서 후배들에게 한 연설의 일부입니다. 학업에 큰 성취 있기를 바랍니다.

배명복 국제부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