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교보문고 선정 이달의 책] 한국전쟁 전후의 풍속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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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현대문학, 310쪽, 9000원

‘소설은 풍속의 변천이 가져온 참담한 파탄을 보여줘야 한다’는 발자크의 말에 밑줄을 친 적이 있다. 너무 거창하고 섬쩍지근하기도 해 겉돌기만 하던 그 문장이 『그 남자네 집』을 읽는 동안 맴돌았다.

노년에 이른 ‘나’가 후배의 집을 방문하는데 우연히도 그 집이 사십 년 전 ‘나’와 ‘그 남자’가 살던 동네에 있었다. 나의 집은 진작에 헐린 듯 찾을 수 없는데 설마 하고 찾아본 그 남자네 집은 새로 지은 건물들 사이에 푹 꺼지듯 자리잡고 있다. 지금 주인도 그 남자네처럼 화초를 좋아하는 모양인지 마당에는 길도 없이 나무가 무성하다.

한국전쟁 전후 서울은 불탄 자리에 선태식물이 번지듯 살아남은 자들의 아우성으로 가득한 곳이다. “임만 이면 여자들의 목은 움츠러들기는커녕 오히려 빳빳이 일어섰다.” 아기를 업고 임질을 하다 젖가슴이 드러나는 줄도 모르는 여자들이 골목골목을 누볐다. ‘그 남자’의 어머니처럼 평상시엔 허리가 기역자로 굽었다가도 광주리만 이면 허리가 펴지는 신기한 임질도 다 있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반상(班常) 따지기를 좋아하던 어머니도 생계를 위해 하숙을 친다. 시어머니가 딸처럼 아끼는 춘희는 나의 추천으로 미군 부대에 들어가지만 결국은 양색시로 전락하고 마는데 남이 믿건 말건 한때 한가락했었다는 환상 없이는 살아내기 힘든 세상에서 춘희의 꿈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것이다. 숱한 좌절 끝에 미군과 결혼해 미국행에 성공하지만 거듭된 임신중절 수술의 후유증으로 아기를 갖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춘희가 참을 수 없는 건 그가 벌어들인 돈으로 공부하고 밥 먹었던 형제들의 멸시다.임신은 처녀들에게 공포였다. 내가 그 남자와 플라토닉한 사랑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다름아닌 임신에 대한 공포였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무서운 세상이었다. 결혼한 여자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중절 수술을 통해 터울을 조절했다. 내가 그 남자와 여행을 가기로 작정한 것도 결혼한 여자이고 임신을 해도 손가락질 받을 일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일탈은 결국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남자로 인해 결단되지 않는다.

나는 자신에 대한 심한 모멸감으로 흠씬 앓고 일어나는데 그 후에야 그 남자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된다.
전쟁으로 몰살당한 사람 수를 채우듯 베이비붐이 번지던 때였다. 나는 10년 사이에 아이를 넷이나 낳은 아줌마가 되어 그 남자와 재회를 한다. 선녀 옷을 되찾는다 해도 데리고 승천하기에 아이 넷은 너무 많은 듯 어느새 나는 그 생활에 젖어 있다. 뇌수술로 시각을 잃은 그 남자가 눈이 보이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을 더는 참아줄 수 없다. “어리광 좀 작작 부려 이 새끼야.” 마침내 육친애적이고 떳떳한 분노를 터뜨리기에 이른다. “그 남자는 시력을 잃었고 나는 귀여움을 잃었다. 나의 첫사랑은 이렇게 작살이 났다.”

그 남자와의 마지막 만남은 신문에서 본 그의 부음 기사를 통해 회상된다. 그 어머니의 문상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그 남자는 결혼을 하고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돌아가실 때의 어머니가 자신의 헌 빤스를 입고 있었다면서 남자가 통곡을 한다. “와이프가 그걸 보고는 내 손을 끌어다가 억지로 남자 빤스 고추 구멍을 만져보게 하는 거야. 정말 내 빤스였어.” 나도 애끓는 마음을 참을 수 없어 그 남자를 안는다. “우리의 포옹은 내가 꿈꾸던 포옹하고도, 욕망하던 포옹하고도 달랐다. 우리의 포옹은 물처럼 담담하고 완벽했다. 우리의 결별은 그것으로 족했다.”

그동안 전쟁의 상흔에 관한 이야기는 남자들의 시각에서 쓴 것이 많았다. 직접 총을 들고 전쟁터로 나가지는 않았지만 여자들의 이야기는 살아남은 자의 목소리도 생생히 전달된다. 극악하게 울어대는 매미떼 같던 시절, 풍속(風俗)은 풍속(風速)을 감지해내지 못할 정도로 변모했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임질한 목을 되려 뻣뻣이 들어올리듯 여자들은 안간힘을 썼다. 나에겐 『그 남자네 집』이 이뤄지지 못한 아련한 첫사랑 이야기로 읽히지는 않는다. 그 사랑 또한 그 시절의 한 풍속처럼 읽혀 너무도 덧없다.

하성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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