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간첩사건까지 조작한 공작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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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여간첩 수지 金 사건'을 둘러싼 국가정보원과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의 조작.범행 은폐 기도는 공권력이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공작정치의 본보기다.

또 간첩 누명을 쓴 피해자 수지 金의 가족이 당한 고통을 보면서 정보 공작정치의 악랄함과 비인간성을 다시 한번 실감하며 분노한다.

여기에 지난해 국정원 간부들이 경찰의 수지 金 사건 수사를 중단시킨 부분도 충격이다. 최근 국정원에 쏟아지는 의혹들을 보면서 정보기관의 조작.은폐 기도가 과연 이 사건뿐일까 하는 의구심도 지울 수 없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을 종합하면 '여간첩 수지 金 사건'은 안기부와 수지 金의 남편 윤태식씨가 공모해 간첩사건 하나를 완전히 조작한 꼴이다.

1986년 부부싸움 끝에 남편 尹씨가 수지 金을 목졸라 숨지게 한 뒤 월북 도피를 기도하다 여의치 않자 "북한 공작원인 수지 金이 북한으로 납치하려 해 탈출했다"고 안기부에 허위 신고한 것이 사건 개요다. 그러자 안기부는 87년 1월 尹씨의 기자회견과 함께 '북한 공작원에 의한 홍콩 교민 납북 미수사건'이라고 이를 대대적으로 발표했었다.

결국 안기부는 尹씨의 범행 내용을 파악했으면서도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살인사건을 간첩사건으로 둔갑시킨 셈이다. 그동안 중앙정보부.안기부 등 정보기관의 가혹행위나 인권 침해 시비는 자주 있었지만 본질을 뒤집고 송두리째 조작한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당시 안기부는 범행을 자백한 尹씨의 자필 진술서까지 확보해 놓았었다니 변명이 필요없는 상황이다. 아울러 이 사건 이후 '빨갱이 가족'으로 몰려 부모.형제 등 온 집안이 풍비박산된 억울하고 한맺힌 사연을 보면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공작정치가 아직도 이 땅에서 현재진행형임을 말해준다.

지난해 초 경찰이 홍콩 수사당국으로부터 자료를 넘겨받아 수사에 착수하자 국정원 간부들이 "대공 관련 사건이므로 수사 자료 일체를 넘기고 수사를 중단하라"고 요구한 것은 공작정치의 맥이 지금껏 살아 있음을 뜻한다.

국정원이 안기부의 범죄행위를 덮어주려 했다면 명칭만 바뀌었을 뿐 안기부나 국정원이 한통속임을 보여준 셈이다. 단순 살인사건에 불과한 수지 金 피살사건이 어째서 안기부가 아닌 국정원에서까지 계속 대공 관련 사건으로 분류돼야 하는가.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파헤치고 낱낱이 공개해 다시는 이같은 사건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같은 짓을 저질렀으며, 가담 주체는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응징해야 한다. 공소시효나 형사처벌 여부에 얽매일 문제가 아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공무를 빙자한 공직자의 반인륜적 범죄행위는 결코 시간에 묻혀 넘어가지 않는다는 교훈을 남겨야 한다. 또 지난해 국정원 간부들이 경찰 수사를 중단시킨 경위와 범법 여부도 가려내 책임을 물어야 한다. 아울러 국정원은 피해자 가족들의 신원(伸寃)에도 소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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