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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하오! 중국] '동양의 진주' 홍콩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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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영국이 아편전쟁에서 승리해 할양받기 전까지 홍콩은 광둥(廣東)성의 한적한 어촌(漁村)에 불과했다.

영국의 동아시아지역에 대한 아편판매 등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홍콩을 찾아 들어 온 1차 이민들은 광둥과 푸젠(福建) 등의 해안에서 수상(水上)생활을 했던 이른바 '단민(蛋民)'들이다.

요즘도 홍콩섬과 주룽(九龍)의 해안가 선상(船上)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이들과 함께 당시 홍콩에서 주택과 항구 등을 짓기 위한 노동자들도 들어왔다.여기까지는 단순한 인력 유입이다.

홍콩 중문대 에릭 마(馬傑偉)교수는 "홍콩의 문화는 한 마디로 난민(refugee)의 문화"라고 말한다. 馬교수는 "1949년 중국대륙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대량의 난민들이 홍콩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들이 식민지 홍콩에 새 문화현상을 가져 온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홍콩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난민의 문화는 훨씬 나중에 형성됐다는 주장이다.

전란을 피해 홍콩을 찾아 온 '난민'들의 출현은 사실 이보다 조금 앞선다. 1851년 중국에서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이 발생하면서 광둥성의 지주와 상인 등이 홍콩으로 대량 이주한 것이다.

하지만 馬교수의 주장대로 실제 홍콩의 문화는 대륙의 공산정권을 피해 찾아 든 난민들에 의해 구체적인 모습을 띠어간다. 이들은 대부분 대륙출신의 자산가들이다. 이 가운데 압도적이었던 사람들은 상하이(上海)출신들이다.

상하이 출신자로서 홍콩에서 10년간 생활했다는 한 여성은 "우리 고향사람들은 오늘날 홍콩의 번영에 실질적인 힘이 됐다고 자부한다"며 "홍콩은 당시 상하이의 자본과 인력 유입이 없었다면 결코 경제적인 성장을 이루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45년 홍콩의 인구는 60만명에 불과했지만 공산정권을 피해 들어온 상하이 등지의 사람들로 인해 인구는 2백80만으로 크게 늘어난다. 오늘날 6백만명에 달하는 홍콩 인구의 틀이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특이한 점은 새로 유입한 이들 난민은 각자 자신의 고향사람들과 함께 특정지역에 자리잡았다는 사실이다. 특히 상하이 사람들은 오늘날 홍콩섬의 박곡(北角)에 집중 거주했으며 광둥성 차오저우(潮州)사람들은 홍콩섬의 서쪽인 셩완(上環)에 터전을 잡았다.

홍콩 중문대 역사학과 궈사오탕(郭少棠)교수는 "난민들이 홍콩에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출신지별로 모여들어 지역적인 특성을 이룰 때가 있었다"며 "새로 홍콩에 들어 온 사람들은 고향사람들이 몰려 사는 곳에 우선 자리를 잡은 뒤 생계 수단을 찾았다"고 말했다.

49년 대륙에 공산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 동아시아 최대 국제도시였던 상하이 사람들의 유입은 홍콩에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줬다.

당시 상하이는 홍콩이 결코 함께 견줄 수 없을 만큼의 문화적 선진지대였다. 상하이의 복장이 홍콩시내에 등장한 것을 비롯해 상하이풍의 이발소.양복점.식당.점포 등이 선을 보이면서 홍콩의 중산층 문화를 형성해 간 것이다.

특히 50년대 초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미국이 중국의 대외창구를 봉쇄한 때였고, 따라서 홍콩의 경기도 자연히 쇠락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이 때 몰려든 상하이의 자본이 홍콩경제의 비상에 더할 나위 없는 활력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한때 '세계 해운왕'으로 꼽혔던 바오위강(包玉剛),현 홍콩행정특구 수반인 둥젠화(董建華)의 부친 둥하오윈(董浩雲) 등은 모두 상하이 해운업계의 거물로 당시 홍콩의 해운업을 이끌었던 대표적 인물이다.

어 쨌든 상하이의 자본과 인력 유입을 바탕으로 70년도까지 홍콩의 공장은 1천4백여개에서 1만6천5백여개로 늘었고, 노동자의 수도 8만명에서 55만명으로 크게 늘었다.

식민통치국인 영국의 문화도 가세했다. 홍콩 유력지 명보(明報) 편집국장을 역임한 주하이(珠海)대학 리구청(李谷城)교수는 "영국의 통치가 홍콩의 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49년 중국의 공산화 이후"라며 "특히 60.70년대 들어 홍콩인들에 대한 참정권을 부여하면서 홍콩과 영국의 문화가 본격적으로 융합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중국의 기층문화에 통치계층인 영국의 문화가 한 데 엉키면서 홍콩은 세계 자유무역의 중심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이어 세계수준의 효율성을 선보이며 '동방의 진주(東方之珠)'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는 설명이다.

2천홍콩달러(약 32만원)만 있으면 회사를 설립할 수 있게 한 제도, 손바닥만한 면적에 세계적인 교통량을 소화해 냈던 옛 카이탁(啓德)공항, 연간 1천만명을 끌어들인 화려한 관광정책 등은 지난 날의 홍콩문화를 지칭했던 '홍콩 익스프레스(홍콩특급)'의 상징들이다.

중국의 공산화 이후 상하이 사람들과 문화의 유입이 홍콩으로서 첫 충격이었다면 두번째 격변기는 97년이다. 중국이 1백50여년 만에 홍콩의 주권을 영국으로부터 회수한 것이다.

중국 공산당의 홍콩 진입을 두려워한 일부 홍콩사람들과 자본이 서둘러 해외로 빠져나가기도 했지만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오늘날 홍콩의 모습은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밖으로 빠져 나갔던 홍콩인들과 자본이 다시 홍콩에 들어온 것은 중국의 개혁.개방에 대한 믿음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취재기간에 만났던 교수들은 한결같이 "97년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사회구조가 변했다기보다 중국대륙에 대한 사람들의 심리구조가 변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리구청 교수는 "난민사회의 속성상 민족적인 정체성을 찾기보다 현금과 물질 등에만 집착했던 홍콩 사람들이 이제 서서히 민족과 국가라는 관념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며 "예전에 지녔던 고도의 사회적 효율성이 앞으로 다소 떨어질지는 모르지만 민족적 정체성에 입각해 옛 식민지 시대의 지나치게 경박하기만 했던 상업주의적 문화토양을 바꾸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광종 기자

*** 홍콩 영화의 명암

*** 홍콩 영화의 명암

영화는 홍콩의 문화와 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대표적 장르다.

대륙으로부터의 이민 유입, 문화대혁명 등 대륙의 정치적 상황과 홍콩 사회의 문제점 등을 그대로 반영하면서 홍콩 영화는 성숙해 왔다.

강시 시리즈를 비롯한 괴기영화, 리샤오룽(李小龍)과 청룽(成龍)으로 대표되는 무술영화, 1980년대 세계시장을 화려하게 누빈 '홍콩식' 폭력영화, 할리우드를 뺨치는 SF….'홍콩영화'하면 떠오르는 말들이다.

홍콩의 영화는 지난 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완연히 상하이의 지배아래 있었다.

70년대를 주름잡았던 '쇼 브러더스'도 상하이 출신 소(邵)씨 형제들이 세운 영화사다.

초기 무성영화부터 홍콩영화를 좌지우지했던 상하이 영화는 49년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를 피해 대량으로 유입했던 상하이 사람들을 통해 홍콩영화계를 더욱 장악한다. 대만쪽의 영향을 받는 우파와 대륙을 지지하는 좌파로 나눠지는 것은 50년대 상황이다.

하지만 대륙의 전제주의적 정권,대만의 독재에 모두 실망하면서 홍콩인들은 대륙.대만과는 무관한 홍콩인만의 정체성을 찾게된다. 이같은 분위기를 타고 70년대 이후 홍콩 특유의 영화가 대량으로 나온다. 리샤오룽의 성공, 그의 사망 이후 무술영화에 코미디를 가미해 나온 청룽식 영화 등은 이같은 기류 속에서 만들어진 대표작들이다.

이들은 70년대에 이어 80년대까지 크게 번성한다.

이런 여건 변화 속에 기존의 거대 영화제작사가 지배하던 구조가 독립 프로덕션의 제작시스템으로 대체되면서 영화는 홍콩을 상징할 만한 산업으로 발전한다. 독립프로덕션들의 무궁무진한 상상력과 제작 시스템의 융통성 등이 결합하면서 세계 영화시장에서 사업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90년대 홍콩인들의 마음에 자리잡은 화두는 '홍콩의 중국 귀환'.

영국이 통치했던 식민지 시대를 벗어나 조국인 대륙으로 돌아가는 홍콩인들의 심리는 복잡했다. 리롄제(李連傑)의 '황비홍'으로 애국주의가 대두되는가 하면, 과거를 돌아보는 영화가 늘기도 했다. 요즘의 홍콩영화는 고전을 면치 못한다. 기민한 상상력과 발빠른 제작시스템으로 성가는 높였지만 이를 뒷받침해줄 문화적 콘텐츠가 부족해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의 홍콩영화는 '저질'이라는 평가를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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