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교수 "미당의 과오는 시에서 이미 예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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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친일.친독재 등 미당 서정주(1915~2000)시인의 '정치적 과오'는 그의 '허용의 시학(詩學)'에서 비롯됐다는 평론이 나왔다. 문학평론가 황현산(고려대 교수)씨는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발표한 '서정주 시세계'에서 미당의 언어관과 시법(詩法)이 그의 정치적 이력과 맺고 있는 관계를 밝히고 있다.

지금까지 미당에 대한 비판은 주로 그의 이력으로부터 시 비판으로 들어갔으나 황씨는 시 자체의 분석을 통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미당의 '생리'를 밝히고 있어 주목된다. 황씨는 미당의 초기 시는 "식민지의 곤궁하고 마비된 삶을 어떤 새로운 전환의 출발점으로 삼으려는 창조의식과 소명감"에서 출발했다고 보았다. 즉 식민지라는 불리한 여건을 통해 순결성을 확보하려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번째 시집 『귀촉도』(1948)이후 미당은 "모든 구속에서 벗어났다고밖에는 볼 수 없는 어떤 정신이 되어, 선율 있는 토착어로 공교로운 시법을 구사해 이른바 민족정서를 노래했다"고 보았다.

그 공교로운 시법이란 "불확실한 것에 대한 은유를 말하기 전에 확실한 것들에 대한 비유를 나열함으로써, 저 알 수 없는 세계의 존재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확실한 것일지라도 시인 자신에게는 확실하게 지각된 것임을 틀림없이 심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미당은 신화나 전설 등을 옛사람들의 글에서 차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직접 그 세계의 주인이 된다. 그러나 미당에게는 그 순수의 세계, 신화의 세계를 말할 권리는 있으나 그에 대해 봉사할 의무는 없다는 것이 미당의 허무의식이요, 이것은 역사적 허무의식과 곧바로 연결된다는 것이 황씨의 지적이다.

황씨는 "미당은 신화를 세속화할 수 있었지만, 세속을 진정으로 높은 자리에 올려놓지는 못했다. 그 일을 위해 필요한 '책임지는 목소리'가 없었기 때문"이라면서 "미당의 시세계는 책임없이 아름답다"고 결론을 맺었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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