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션와이드] 전남 구례읍 당치·농평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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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지리산은 금강 ·한라와 더불어 신선이 내려와 살았다는 삼신산 가운데 하나다.전남 ·경남 ·전북을 어우르는 큰 산이다.사방이 첩첩 산중으로 둘러쳐진 지리산 자락에 사람이 산다.겨울 채비에 한창인 구례산골 주민들의 삶은 어떨까?

대여섯살 꼬마들이 유치원에서 노래를 배울 때 빠지지 않는 곡으로 '토끼야, 토끼야. 산 속에 토끼야. 겨울이 되면은 무얼 먹고 사느냐'하는 것이 있다.

산골마을 사람들의 겨울 삶은 산속 토끼의 그것과 흡사하다.

근대 역사에서 지리산 산골마을은 빨치산 활동 탓에 민초들이 말못할 고초를 겪은 애환이 서린 곳이다.

구례읍에서 19번 국도를 따라 경남 하동쪽으로 가다 연곡사 방면으로 들어서 역사의 현장 피아골을 거슬러 올라가면 토지면 평도리에 이른다.

이 곳에서 오른편으로 난 시멘트 도로를 따라 30여분쯤 걷다보면 해발 5백여m 지점에 20여가구 주민들이 사는 당치마을이 나온다.

등산객 민박시설로 지은 3~4채를 제외하면 안팎을 경계 짓는 대문조차 없고 나무로 밥을 짓고 안방 아랫목도 달군다.

"4년 전에 자식들이 보일러를 해줬는디 마누라하고 두 식구뿐이라 기름값이 아까와서 애시당초부터 나무로 불때고 있제."

부인 이옥자(62)씨와 단 둘이 사는 최재섭(66)씨는 "이젠 장작 패는 일이 힘에 부쳐 일년 내내 싸리나 잔가지를 모아 땔감으로 사용한다"고 말했다.

산골 마을의 겨울채비 가운데 특이한 점은 평지보다 섭씨 5도 이상 낮은 고지대라 곡식이 얼지않게 곳간을 볏짚으로 싸고 비닐을 씌워야 하는 보온작업이다.

농기계를 쓸 수 없는 계단식 논이기 때문에 농사철에 장정 두세명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소들의 여물을 준비하는 것도 중요한 겨울나기 행사다. 사람이 먹을 곡식보다 소가 한겨울을 보낼 여물을 모으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긴다.

당치마을에서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오르면 해발 8백m 지점에 터전을 닦은 농평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자연마을 단위로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고산 동네다.

40년 전까지 봇짐장수들이 건어물.소금을 이고 지고 남해와 하동에서 섬진강을 따라 화개나루에 도착, 해발 9백42m 황장산 능선을 넘어 농평마을까지 장사를 왔다.

발품팔이로 고단해진 봇짐장수들이 농평마을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고 마을 뒷산 통꼭봉과 불무장등을 거쳐 삼도봉을 넘어 장터목까지 장사를 다녔단다.

한때 가구수 60여호에 이를 정도로 번창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다섯가구 주민 열다섯명이 살고 있다.

"도시생활이 편하다지만 여기만 못할거여. 공기 맑고 물 좋고 조용하고 편한디 뭣땜에 외지에 사는 자식들에게 붙어 살아."

4대에 걸쳐 이곳에서 살고 있는 장찬봉(73)할아버지는 바람도 쐴 겸 널린 땔감도 주울 겸 뒷산 통꼭봉(해발 9백4m)을 오르며 동네 자랑을 했다.

최연소 가장(□)인 김삼권(43)씨의 부인은 취재 일행에게 당귀뿌리에 토종꿀을 넣어 손수 끓인 당귀차를 내놓는다. 차맛보다 인심이 더 달다.

지난해 3월 농평분교가 폐교되면서 아들 지리산(12)과 딸 효림(10)이는 구례읍내 초등학교에 다닌다. 김씨 부부는 24㎞나 떨어진 읍내까지 자녀들을 등하교시킨다.

김씨는 "눈 많고 바람 거센 곳이어서 집 벽에 단열재로 덧옷 입히는 것이 마을 주민들이 치러야 할 큰 일"이라고 했다.

다시 19번 국도를 내려와 구례읍 쪽으로 달리다 문수사 이정표를 따라 오른편 마을길로 7~8㎞를 오르면 임진왜란 때 김해 김씨 일가가 정착하면서 형성된 토지면 문수리 밤재(栗峙)마을이 나온다.

밤재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안방재 마을에는 원형이 온전히 보존된 귀틀집 한채가 있다.

몇년 전 할머니를 여의고 대구에 사는 아들네 집으로 거처를 옮긴 뒤 이따금 마을을 찾는다는 남순임(90)할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지었다는 귀틀집이다.

다섯가구 아홉명이 사는 안방재는 겨울에는 무릎까지 빠질 정도로 눈이 내려 차량이 통제되는 날이 많다.

"초가는 없는디 당체(워낙) 눈이 많고 추운 곳이라 가을부터 땔감을 모으고 벽.창문 등 집 수리를 끝냈제."

겨울나기를 위한 만반의 채비를 마친 주민 황인행(64)씨는 저 멀리 왕시루봉이 눈으로 덮일 날을 기다린다고 했다.

봄에는 고로쇠 수액을 채취하고 여름부터 가을까지 토종 한봉치기, 늦가을에서 겨울 초입까지는 어느 집에나 한두 그루씩 심어놓은 감나무에서 딴 감으로 곶감을 만든다. 산골마을 주민들의 생업이다.

봄에는 산 아래서부터 피기 시작하는 벚꽃.돌배꽃.싸리꽃. 가을에는 산봉우리부터 타기 시작하는 단풍. 산은 그대로 있고 철마다 경치가 바뀌는데 지루함이 있을 리 없다. 산골마을 주민들은 산과 더불어 이렇게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글=구두훈.사진=김상선 기자

*** 연곡분교생 17명의 겨울나기

'겨울엔 겨울엔 모두 모두 장갑 끼고 눈싸움 편갈아 붙으지. 겨울엔 겨울엔 강이 얼어 모두 모두 썰매타고 놀지. 겨울엔 겨울엔 온 마을이 하얗게 옷을 입지.'

피아골 골짜기에 터를 잡은 토지초등학교 연곡분교 어린이가 쓴 동시 '겨울이 오면'의 한대목이다.

온통 눈으로 덮이는 마을의 겨울풍경을 산골 어린이답게 소박하게 표현했다.

학년별로 1백명을 웃돌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전교생이 17명으로 줄어 1997년 3월엔 초미니 학교로 변했다. 산간 벽지가 많은 구례군에서도 유일한 분교다.

학교를 방문한 지난 9일 마침 점심시간이라 교사와 학생들이 집마당처럼 아담한 운동장에서 "꼬마야 꼬마야 땅을 짚어라"라는 노래를 부르며 줄넘기에 여념이 없었다.

"집에 가면 심심해서 할아버지처럼 다정한 선생님과 노는 것이 가장 재미있다"는 3학년 손문화(9)양은 "이곳이 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곳"이라고 자랑했다.

동네 사랑방 같은 세칸 교실에서 2개 학년씩 공부를 한다. 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학생이라야 4~8명.1대1 수업이 가능해 학습 집중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단다.

김칠용(52)교사는 "도시 학교와는 비교할 수 없는 교육 여건이지만 '온종일 교육'이 가능한 장점도 있다"고 말했다.

이곳 분교 어린이들은 과외를 모른다. 더욱이 손양을 포함해 전교생의 절반을 넘는 열명이 아직 기차도 타보지 못했다.

학생 부족으로 지난해 문을 닫을 뻔했으나 주민들과 군교육청이 나서 겨우 폐교조치는 면했다. 그러나 언제 학교가 사라질지 모른다.

하지만 산골 개구쟁이들은 불투명한 학교의 미래에는 별 관심이 없다.

겨울이 되면 학교 담 너머 계곡에서 비료 포대를 엉덩이에 대고 '스키'를 타고, 팽이치기와 연날리기를 하며 신나게 놀 생각뿐-.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다 보면 동심이 저절로 움튼단다. 긴긴 겨울을 지내고 나면 어느새 아지랑이 피는 봄, 그리고 마음껏 피아골에서 물장구칠 수 있는 여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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