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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2기, 실용외교로 갈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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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콘돌리자 라이스가 콜린 파월을 대신해 미 국무부 장관에 임명됨으로써 과거 아서 슐레진저 전 케네디 대통령 특보가 말했던 '제국(帝國)적 대통령제'의 승리를 목격하게 됐다. 백악관은 어느 때보다 미국의 외교정책을 직접 책임지게 된 것이다. 확실한 대중적 지지와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 그리고 지적.감정적으로 확실한 부시 가족인 국무부 장관이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외부의 다른 시각과 균형감각 등이 영향을 발휘할 여지가 어디 있겠는가. 확실한 건 라이스를 보좌하면서 다른 의견을 내어본 적이 없는 스티븐 하들리 신임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으로부터 또 다른 시각을 전혀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어떤 점에선 1970년대 키신저 시대로 되돌아 간 듯한 느낌도 든다. 당시 헨리 키신저 장관이 이끌었던 미 국무부와 그의 보좌관이 주도했던 미 국가안보회의(NSC) 간에는 아무 이견이 없었다. 과거와 현재의 차이라면 당시엔 키신저의 생각이 대통령의 세계관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현재는 그 반대다. 즉 부시의 생각이 라이스 장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이념에 치우친 외교정책을 구사하지 않는다면 라이스 임명에도 불구하고 미국 대외정책이 보다 과격하게 돌아가지 않을 수 있다. 외교정책 담당자들의 성향 때문이 아니다. '현실'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시 2기 행정부 출범과 관련, 일부에선 보다 '혼성(混性)적인 정책'이 실시될 것으로 내다본다. 즉 국내 문제는 더 과격하게 대처하는 반면 대외 문제에선 필요에 의해 보다 온건한 정책을 펼 것이라는 얘기다. 과세.교육.사회보장제 등과 같은 국내 이슈의 경우 부시 2기 행정부는 마치 수행해야 할 임무가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다. 네오콘들의 급진적인 프로그램 및 동성애 결혼, 낙태 등에 대한 기독교적 도덕률로 인해 부시는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느낄지 모른다. 또 미국 역사를 보다 보수적인 방향으로 끌고 가라는 사명을 미국 대중으로부터 받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급진적이고 종교적 접근은 미국과 다른 세계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문화 간 충돌을 불러올 수 있다. 예컨대 미국보다 세속적이고 자유분방한 유럽과 마찰을 빚을 수 있다. 미국은 바깥 세상과 정치적 논쟁을 벌일지도 모른다. 종교와 정치 간 관련성 및 국제사회에서의 정신적 가치 등을 강조한다면 부시 2기 행정부는 미래의 논쟁을 예비하는 셈이 된다.

반면 외교 문제에 있어 부시 2기 행정부의 접근법은 더 실용적이고 현실적이 될 것이다. 아버지 부시와 레이건 전 대통령이 채택했던 정책과 유사하다. 부시 행정부의 최우선 외교정책이 '테러와의 전쟁' 및 '중동의 민주화'임에는 변화가 없다. 그럼에도 미국이 이라크 내 평화 정착에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워싱턴과 미국 국민 사이에서 군사적 모험을 원하는 기미는 찾을 수 없다. 비록 미국이 핵으로 무장된 이란을 용납할 수 없으며 북한의 군사적 무책임을 견딜 수 없다 하더라도 미국이 또다시 군사력을 사용할 것 같진 않다. 부시의 재선으로 새로운 세계대전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일부 분석은 맞지 않다. 부시 정권하에서 미국은 국제 문제 해결을 위한 동맹국이 필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다른 나라를 모르고 무관심해서는 제대로 풀 수 없다. 미.유럽 관계가 예전같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이 경제.지정학적으로 신경 써야 하는 나라들이 있다. 바로 중국.인도.러시아다. 러시아는 에너지 자원과 핵 능력 덕택으로 특별대우를 즐기고 있다. 민주주의의 신장은 푸틴의 러시아엔 적용되지 않는다.

결국 지나친 기대나 두려움을 가지고 이 새롭고도 구태의연한 미국을 맞이해선 안 된다. 새 부시 정부는 국내 문제에서의 기존 입장 강화, 대외 문제에선 유연한 태도라는 성격을 지닐 것이다.

도미니크 모이시 프랑스 국제관계연 고문
정리=남정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