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11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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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114. 선림고경총서

성철 스님이 스스로의 법문집 11권과 함께 각별한 관심을 보인 책이 『선림고경총서』라는 37권짜리 방대한 선어록(선승 등의 어록)이다.

『선림고경총서』(이하 총서)발간은 일단 방대한 분량에다, 한문으로 된 선어록을 국역해 펴내야 하기에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서 발간에 매달렸던 것은 성철 스님의 선(禪)사상을 상징하는 돈오돈수(頓悟頓修.깨달음이나 수행이 갑작스럽게 이뤄진다는 이론)와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출간의 계기가 된 것은 1980년대 중반, 동국대에서 열린 학술토론회였다. 마침 성철 스님이 펴낸 『선문정로』에 대해 발제를 한 교수가 있다기에 만사를 제쳐놓고 상경했다. 발제가 끝나고 토론시간이 되자 질문이 쏟아졌다.

"성철 스님이 국조를 보조(普照)스님이 아닌 태고(太古) 보우(普愚)스님으로 주장하는데 발표자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성철 스님은 돈오돈수를 주장하는데 그 근거는 무엇인가. 아무래도 보조스님의 돈오점수(頓悟漸修.갑작스럽게 깨닫고 수행은 점진적으로 이룬다는 사상)가 옳다고 생각하는데 발표자의 의견은□"

성철 스님에 대한 학계와 승단 일부의 비판이 몽땅 그 교수에게 집중된 것이다. 그 교수는 자신의 전공이 아닌 분야에다 성철 스님의 사상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안된 상황에서 명쾌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이날 해인사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무척 충격적이었다.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사상은 평생 설파해온 선사상의 핵심인데 해인사 일주문 밖을 나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보조스님의 돈오점수를 연구한 박사들이 시쳇말로 진을 치고 큰스님의 돈오돈수를 폄하하는 함포사격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백련암으로 돌아와서 성철 스님에게 보고했다.

"학회에 가보니 모두 다 보조사상을 연구한 박사들입니다. 해인사 골짜기에서 선종 전통사상은 돈오돈수라고 외쳐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습니다. 큰스님 사상을 뒷받침할 인재를 키우셔야지 이러다간 나중에 큰일 나겠심더!"

묵묵히 듣던 성철 스님이 갑자기 가슴을 치며 큰소리로 말했다.

"니 지금 인재양성이라 캤나□ 이놈아, 나는 평생 인재양성이 뭔지 모르고 살았는줄 아나□ 이놈아, 키울 인재가 없는데 나보고 어째란 말이고. 너거들이라도 내 뜻을 알아 좀 똑똑히 살아줘야지, 다 머저리 곰새끼들만 우글거리니 나도 별수없지."

스승의 뜻을 좇지못하는 제자로 유구무언일 뿐이었다. 며칠 고민한 뒤 큰스님을 다시 찾았다.

"사람 키운다는 것이 말씀처럼 욕심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때를 기다리기로 하시고, 대신 역대 조사(祖師.선종의 고승)들의 어록 중에서 돈오돈수 사상을 주장한 것들을 번역해 널리 알리면 큰스님 사상의 울타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은 방법이겠네."

부랴부랴 선종 서적 30권 가량의 목록을 정리해 큰스님에게 올렸다. 그 가운데 큰스님의 사상과 잘 맞는 것을 골라달라고 부탁했다. 일주일쯤 지나 대여섯권의 책이름을 더해서 건네받았다. 모두 37권의 총서목록이 확정됐다.

목록만 만들면 쉬울 것 같았는데 막상 시작해보니 산 넘어 산이었다. 당장에 번역자가 없었다. 난해한 선사들의 어록이라 어렵게 부탁을 해놓으면 번역료가 만만찮다. 큰스님에게 여쭈니 "불교 책은 법보시로 하는 것이니 신도들에게 얘기해 봐라"는 말뿐이다. 그래서 한 계좌 20만원으로 회원을 모았으나 쉽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원고 준비부터 따져 거의 10년 가까이 걸려 93년 10월에 완간될 수 있었다.

중간중간 걸려오는 선방 스님들의 호통도 적지않은 고통이었다. 어떤 스님은 전화를 걸어와 다짜고짜로 "선어록 번역을 당장 집어치워! 큰스님께서 번역하시는 줄 알았는데 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것들이 앉아서 번역하고들 있다며"라고 힐난했다."그래도 번역을 해놓아야 많은 스님들이 볼 수 있지않느냐"며 해명하고 설득했지만 거의 의미가 없었다. 완간되기까지의 고통을 씻어준 것은 "수고 마이 했데이"라는 성철 스님의 칭찬 한마디였다. 20여년을 모시면서 처음 들어본 칭찬이었다.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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