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작고 문인 48인의 육필서한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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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우리나라 현대문학사를 수놓은 대표적 시인과 작가 48명이 육필로 쓴 편지 원본 2백15통을 모은 책이다.

문인들이 일상의 풍파속에서 겪은 삶과 예술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연인에게 보내는 인간적 목소리 등이 생생하게 묻어난다.

특히 쓰여진 시기가 일제 말기나 해방 직후이기 때문에 당시 문인들의 정신세계와 문인사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우리 사회에서 흔치않은 자료집이다. 누렇게 빛바랜 원고지 위에 휘날리듯 쓴 원색 사진과 함께 일반인이 그 내용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각주와 해설도 실었다.

'국경의 밤'으로 유명한 파인 김동환 시인의 탄생 1백주년을 맞아 파인의 셋째 아들 영식씨가 엮은 이 편지집의 필자들은 김동환.박종화.백철.마해송.이헌구.유치환.설창수.김광주.김광균.황순원.조지훈.이육사.박목월.박남수 등이다.

여성 문인으로는 손소희.박화성.최정희.임옥인.이영도.모윤숙.노천명 등의 편지가 수록되었다. 서양화가 김환기의 서간 및 그림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2백15통 가운데 절반이 훨씬 넘는 1백75통은 문인들이 소설가 최정희에게 보낸 것이다. 이밖에 김동환이 부인에게 보낸 32통, 최정희가 김동환에게 보낸 1통, 최정희가 이영도에게 보낸 2통 등이 나머지를 차지한다.

이 편지집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최정희는 한때 김동환의 연인으로 딸 둘을 둔 바 있다. 최정희를 향해 "나는 고독한 시계입니다/ 당신은 내 안의 진자입니다"라고 사랑을 고백한 시인 김종한이 17통의 연애편지를 보낸 점이 눈길을 끈다.

또 노천명이 "그래 당신을 추천하고 내가 교섭한다구 햇쓰니 당신 수고스럽지만 나를 돕는 일이니 수고를 좀 해주어야겟소. 단 병정얘기구. 어쨋든 군국물이래야 한답니다"라며 최정희에게 친일작품을 청탁하는 편지에서 우리의 뒤틀린 근세사도 다시 확인하게 한다.

월북 문인 10여명의 편지도 자료가치가 높다. 카프를 주도한 한설야, 현대소설 문장론을 쓴 이태준과 함께 김남천, 박태원, 이용악, 김사량, 이현욱 등의 편지가 수록돼 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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