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편법 노조전임’ 인정한 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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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노·사·정이 7월 1일부터 시행될 타임오프 한도를 무력화하는 방향으로 합의했다. 노·사·정은 11일 ‘근로시간면제한도(타임오프) 시행 관련 합의문’을 발표했다. 이 합의문에서 3자는 논란이 된 상급단체 노조전임자의 임금 보전 문제(본지 5월 11일자 1면)와 관련, “노사 상생 협력 차원에서 풀어나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는 모호한 문구를 썼다. 노동부 전운배 노사협력정책국장은 “상급단체에 사업용역을 주는 방식으로 재정을 확충해주는 방안에 대해서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재원 조달과 전달 방식, 지원 기간 등은 노사정위 협의체에서 구체적으로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상급단체 노조전임자가 기업이나 정부의 돈을 받으면서 활동할 수 있는 길을 터주고 세부 방안은 추후 정하겠다는 얘기다. 이는 근로시간면제심의위원회(근면위)가 정한 타임오프 한도(조합원 규모별 0.5~24명)를 무력화하는 조치여서 논란이 거세질 전망이다.

노·사·정은 또 타임오프의 한도를 수시로 바꿀 수 있게 했다. 시행상황을 점검해 노동부 장관이 타임오프 한도의 적정성 여부를 근면위에 심의 요청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키로 했다. 현행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에는 타임오프 한도를 3년마다 결정토록 하고 있다. 합의문대로라면 노동부 장관이 법을 어겨가며 3년이 되기도 전에 근면위에 재심의를 요청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한국노총은 이날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한나라당과의 정책 연대도 유지키로 했다. 하지만 내부 반발로 집행부가 총사퇴했다. 민주노총은 성명을 통해 “구걸하지 말라”며 한국노총을 비난했다. 7월부터 타임오프제가 시행되더라도 현장에서 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되는 장면이다.

◆‘지방선거에 발목 잡혔나’=정부는 당초 ▶사업장 내 전임자에게만 타임오프 적용 ▶근면위 의결은 3년마다 실시라는 원칙을 고수했다. 하지만 이 원칙이 이번 합의문에서 크게 흐트러졌다.

임태희 노동부 장관은 최근까지도 “전임자를 없애라는 것도 아니고 줄이라는 것인데 어떻게 정책 연대 파기를 거론할 수 있느냐”며 한국노총을 비난했다. “(타임오프와 관련) 타협할 생각이 없다”고도 했다.

그러던 임 장관이 이번 노·사·정 합의를 주도했다. 이 때문에 노동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임 장관도 결국 정치인이다. 6·2 지방선거를 외면할 순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방선거를 코 앞에 둔 여권으로선 한국노총과의 정책 연대가 절실한 상황이다. 그래서 한국노총을 달래려 무리수를 뒀다는 얘기다. 성균관대 조준모(경제학) 교수는 “정치 논리에 원칙이 실종됐다”고 말했다.

◆정부 도덕성 도마 올라=그동안 정부는 파업 뒤 뒷돈을 챙겨주는 이른바 ‘파업수당’을 없애기 위해 근로감독을 강화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부가 사업용역을 주는 방식으로 전임자 임금을 지원하는 방안을 내놨다. 농성과 정책 연대 파기, 투쟁을 내세운 노동계를 달래기 위해 뒷돈을 댄다는 비난이 나오는 이유다.

모 그룹 인사노무담당자는 “우리 회사 노조가 정부가 제안한 방식으로 재정 확충을 요구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느냐”고 하소연했다. 전임자 무임금 제도의 틀을 우회할 수 있는 방법을 정부가 일선 노조에 알려준 역효과를 우려하는 것이다.

상급단체에 지원할 사업용역 비용도 상당부분 기업이 부담할 공산이 크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타임오프로 노조전임자에게 지급되는 비용절감을 기대했던 기업에 엉뚱한 재정부담을 떠안기는 것 아니냐”며 “이런 합의가 어디 있느냐”고 반발했다.

김기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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