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돌뱅이 방랑 삼천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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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저잣 거리에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장돌뱅이. 좌판을 펼치면 그곳이 가게요, 그 앞에 모이는 사람이 고객이며, 길은 친구다. 각종 축제 장소와 5일장 등을 따라다니는 30대 엿장수와 40~50대 부부의 삶을 엿본다.

#각설이 타령에 호박엿 동나네

볼과 이마에 연지.곤지를 찍어 바르고 치아에 검정 칠을 해 이가 빠진 듯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분장한 얼굴. 빨강.노랑 등 갖가지 색상의 천을 덧대 덕지덕지 기운 흰색 바지.저고리와 여자 속옷, 구멍나고 해진 벙거지. 한쪽 발엔 흰 고무신에 빨간색 양말, 다른 발엔 검정 고무신에 파란색 양말을 신고 허리에는 깡통과 숟가락을 비롯한 온갖 잡동사니들….

지난달 30일 밤 전남 나주시 남고문 앞 '배 축제' 행사장의 각설이 엿장수 조상철(34.경남 통영시)씨.손수레 밑의 앰프에서 빠른 템포의 트로트 노래가 흘러나오자 신나게 춤을 춰댔다.

"얼마나 열심히 까부느냐에 따라 매상이 팍팍 달라짐더. 먹고 살라꼬 '헝그리 정신'으로 하지라."

택시 운전을 하다가 3년 전 엿장수로 변신했고,분장과 가위질 등은 다른 각설이들을 보고 어깨 너머로 배웠다.

"난 우리 동네에서 엿장사를 시작했심더.다른 엿장수들은 넘사스럽다고(창피하다고) 자기 고향 행사에는 잘 안 가는디 난 안 가림더."

趙씨는 "돈만 잘 벌린다면 어딘들 못가예"라며 다시 가위를 철커덕거리기 시작했다.

#차에서 자면서 전국 돌지예

"안 가는 데 없심더.집엔 보름 만에 한 번 들를까 말까 하고 아예 밖에서 살지예."

지난달 29일 밤 전남 나주시 남고문 앞의 배 축제 행사장에서 부인 허창희(47)씨와 함께 커피.호떡.오뎅 등을 팔던 노점상 손재곤(53)씨. 축제 행사장을 찾아다니는 孫씨가 부산시 당감3동 집에서 추석을 쇠고 가을 장사 길에 나선 것은 지난달 6일. 경남 양산시 삼량문화제를 시작으로 그간 들른 곳이 열군데가 넘는다. 1일엔 유자 축제가 열리는 고흥군으로 간다.

신발공장 사장이었던 孫씨가 부도 후 장돌림으로 나선 지 올해로 7년째. 승합차에 작은 손수레와 가스 레인지.음식 재료 등을 싣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축제 행사장들을 찾아가 장사를 한다.

"여관에서 자면 호강이게요. 차 안에서 새우잠을 자고 밥도 해 먹지예.이동하다 목욕탕이 보이면 들어가 제대로 씻죠."

간혹 행사 주최측에서 참가자들에게 무료로 도시락을 나눠줘도 孫씨 부부는 절대로 얻어먹지 않는다.떠돌이 장사꾼이지만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란다.

孫씨는 "같은 장사꾼끼리 얘기하다 보면 옛날에는 잘 나가던 사장님이었거나 대학원 공부까지 한 친구들도 적지 않다"고 귀띔했다.

이해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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