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6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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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흥덕대왕이 해도인 장보고에게 내린 청해진대사.

이는 그 당시 신라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특수한 직명이었다. 신라 신분제도의 원칙에 의하면 백성이나 평민은 관직에 나갈 수 없었으므로 백성도 아닌 천민이었던 장보고에게 내린 대사란 직책은 신라 역사상 장보고 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매우 독특한 관직명이었던 것이었다.

대사라는 관명은 주로 중국에서 사용된 직함으로 '당회요(唐會要)'에는 절도대사(節度大使), 관찰대사(觀察大使), 진수대사(鎭守大使) 등 대사란 직함이 수없이 보인다. 여기에서 대사는 절도사나 관찰사의 별칭으로 그 지역을 관장하는 장관의 뜻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청해진대사'라는 관명은 청해진을 다스리는 장관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원래 대사는 국왕의 명령을 대행하는 자를 가리키며 일본에 있어서도 주로 당에 보내던 '견당사'의 최고 책임자를 대사라고 호칭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처럼 당나라와 일본에서도 대사라는 직명을 사용한 예를 바탕으로 당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청해진대사'라는 특수한 관직명을 일부러 장보고에게 내린 것은 어쩌면 흥덕대왕 자신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신라의 귀족인 진골만이 진(鎭)의 장관을 할 수 있었던 당시의 귀족사회에서 미천한 장보고에게 대사라는 특수 관직명까지 일부러 만들어 교지를 내린 것은 흥덕대왕의 개혁의지가 얼마만큼 강력하였던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흥덕대왕은 장보고에게 신표(信標)까지 내린 것이었다.

"짐은 경을 청해진대사로 제수한다."

무릎을 꿇고 앉은 장보고에게 흥덕대왕은 검을 하사하였던 것이었다. 환두도(環頭刀)라고 불리는 고리칼이었다. 고리 안에 잎사귀 세개를 장식한 삼엽환두도(三葉環頭刀)였는데, 대왕들이 보통 용이나 봉황을 장식한 용봉환두도(龍鳳環頭刀)를 상징적으로 갖고 다닌다면 환두대도는 귀족들이 갖고 다닐 수 있었던 최고의 장식 칼이었던 것이었다.

특히 대왕마마가 신하에게 환두도를 하사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장보고에게 청해진대사로서의 절대 권력을 부여하는 것을 만천하에 고함과 동시에 대왕의 어명을 대리하여 집행한다는 권한의 힘을 실어주기 위함인 것이었다.

이에 장보고는 흥덕대왕으로부터 환두대도를 받아들고 이렇게 말하였다.

"신 장보고 반드시 신명을 다하여 대왕마마의 어명을 받들어 이루겠나이다."

이에 관한 역사적 사실은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흥덕대왕 3년 4월.

청해대사 궁복(弓福), 성은 장씨이니 일찍이 당나라의 서주에 건너가 군중소장이 되었다가 후에 귀국하여 이때 왕을 진알(進謁)하고 병졸 만인으로써 청해를 진수케 하였다."

이로써 장보고는 흥덕대왕으로부터 청해진대사를 제수받고 궁궐을 나와 인덕문을 나섰다. 그는 문 앞에서 다시 말을 타고 기다리고 있었던 부하들과 함께 주작대로를 거슬러 올라갔다.

이제 그는 대왕마마로부터 제수 받은 청해진의 대사였다. 이제는 아무도 그를 해도인이라고 빈정대지 못하였고, 그 누구도 그를 측미하다고 경멸할 수는 없음이었다.

장보고의 허리에는 임금으로부터 하사 받은 어검이 지는 노을의 석양빛을 받고 눈부시게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인생이란 무상한 것.

흥덕대왕으로부터 절대 권한의 신표로 받은 그 환두대도의 칼이 그로부터 14년 후 자객 염장(閻長)의 손에 의해서 자신을 죽이는 흉기가 될 줄은 장보고는 꿈에라도 상상이나 하였을 것인가.

그렇다.

오늘의 영광이 내일은 비극의 씨앗이 될지도 모른다. 또한 오늘의 치욕이 내일은 빛나는 영광이 될지도 모른다. 한치의 앞도 알 수 없는 인간사. 그것이 바로 인생인 것이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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