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6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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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대왕마마."

장보고는 결정적인 흥덕대왕의 질문이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였다.

"만약에 마마께오서 신에게 진영(鎭營)을 설치할 기회를 주시고,약간의 군사를 주신다면 신은 반드시 바다 위에 창궐하는 해적들을 멸하여 해로를 안전하게 보존하겠나이다."

장보고의 말은 가히 상상 조차 할 수 없었던 폭탄적인 선언이었다. 이미 신라의 조정에서는 출몰하는 해적들의 소탕과 안전한 해상교통로의 확보를 목표로 해서 진영을 설치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선덕왕(宣德王) 3년(720년)에는 황해도 금천(金川)에 패강진(浿江鎭)을 설치하고 있었고, 장보고가 흥덕대왕을 만난 1년 후에는 오늘날 남양에 당성진(唐城鎭)를 설치하였던 것이었다.

이는 모두 신라와 당나라와 공무역을 위해 안전한 해상로를 확보하기 위함이었으나 당나라와 신라, 그리고 일본을 잇는 남해바다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던 것이었다. 훗날 844년 오늘날의 강화에는 혈구진(穴口鎭)이란 진영을 설치하였던 것도 모두 공무역을 위해 서해의 해상로를 확보해두려는 신라 조정의 비상책이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신라조정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적들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었는데 감히 장보고는 자신의 입으로 해적들을 반드시 멸하겠다고 장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하면 경은 어디에 진영을 설치하겠다는 것인가."

흥덕대왕이 강한 호기심을 발하며 물었다.그러자 장보고가 대답하였다.

"청해(淸海)이나이다."

"청해라면."

"완도(莞島)라는 섬이나이다."

"어째서 경은 진영을 서남에 있는 섬 중에 설치하려 함인가."

흥덕대왕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 무렵까지만 해도 신라와 당을 잇는 중요한 해상로는 주로 당진과 산동반도를 잇는 황해의 지름길이 고작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장보고가 말한 장소는 전혀 생각지 않았던 서남쪽의 낯선 변방이 아닐 것인가. 그러자 장보고는 대답하였다.

"대왕마마, 청해는 신의 고향으로 그곳의 지리와 물길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나이다. 또한 청해는 당나라와 일본을 잇는 해상교통로의 요충지에 자리잡은 천혜의 요새이나이다.그 누구도 청해를 거치지 않고서는 일본에 갈 수 없으며,또한 청해를 거치지 않고서는 당나라로 갈 수 없나이다.그러나 무엇보다 청해에 진영을 설치하려 하는 것은 해적 때문이나이다.당나라의 해적선들과 일본의 왜구, 그리고 해안지방에 출몰하는 해상도적들을 소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남해의 청해에 진영이 필요하기 때문인 것이나이다."

그로부터 거의 백년 후의 일이지만 고려사(高麗史)에 보면 왕건(王建)이 궁예의 막장으로 있을 때 견훤의 부하 능창(能昌)을 압해에서 격파하고 그를 '물에 익숙한 수달이며 해적'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뿐만 아니라 인근 도서의 견훤 세력하에 있던 해도인들도 모두 해적이나 해상도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 다도해 연안의 도서사람들은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무장하였고, 이들 해상 무력집단들은 유능한 해도인에 의해서 보다 큰 해적으로까지 성장하기도 했던 것이었다. 장보고의 말은 이러한 중국의 해적들과 군소 해상세력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오직 남해의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함을 역설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장보고는 깊은 야망을 갖고 있었던 것이었다. 장보고는 이미 중국산동성 적산포(赤山浦)와 일본 하카타(博多.오늘날의 후쿠오카)에 무역근거지를 두고 있었던 대 무역상인이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만약 남해의 요충지인 청해에까지 진영을 설치하여 당나라와 일본을 잇는 해상로 그 중간에 기착지를 확보할 수 있다면 안전한 남해 항로를 확보할 수 있으며, 또한 중국에서 왕도 경주에 이르는 해상관문인 울산.포항으로 연결되는 신라인들의 해로 또한 자신의 통제하에 둘 수 있다는 일석이조의 이유 때문인 것이었다.

그러나 흥덕대왕 역시 마찬가지였었다. 장보고가 청해에 진영을 설치하는 것은 흥덕대왕 역시 마음속으로 바라던 일이었던 것이었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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