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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보이의 정신분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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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40년이 지난 이 땅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몇 명의 비보이 선수가 정신분열병을 가장해 병원을 찾았고, 일부는 입원도 했다. 정신과 의사들은 환청이 들린다고 하고, 집에서 중얼거리기만 해서 가족들까지도 이상해졌다고 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학술적 목적으로 실험을 재연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군 면제를 위해 환자 흉내를 낸 것이었다. 로젠한의 실험 이후 객관적인 판단을 위한 여러 검사법이 개발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의 말과 행동, 가족들의 관찰이다. 이들은 그 맹점을 이용했고, 또 성공했다.

사실 우리나라의 병역 관련 신체검사는 매우 엄격하다. 과거 병역비리 사건을 거치면서 쉽사리 빠져나가기 어렵게 만들어져 있다. 특히 다른 신체질환이 X레이나 피검사로 객관적 증명을 할 수 있는 데 비해, 정신질환은 그게 어렵기 때문에 진단서 발급도 엄격하고 시일을 두고 경과를 관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어떨 때에는 내가 보기에 군대를 가기 어려운 환자들도 2년이 넘게 재검을 반복하고는 한다.

“선생님 우리 아들 군대 좀 보내주세요.” 여러 정황을 볼 때 현역 복무가 어려운 상황의 환자 부모가 내게 호소할 때가 있다. 남들 다 가기 싫다는 군대인데 그 이유가 뭐냐 물으면 “군대 가면 사람 된다면서요. 그냥 저렇게 집에서만 지내고 아무것도 안 하니 말이에요”라고 말한다. 오죽 답답하면 자기 자식을 군대에라도 보내서 좋아지기를 기대하겠는가. 그만큼 정신분열병은 중증이고 만성적인 질환이다. 입원을 하지 않고 집에서 지낸다 하더라도 일상적 사회생활을 해나가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어려움을 잘 아는 의사들은 이들을 돕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하고,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대한다. 그런데 일부 비보이들은 이런 태도를 악용했다. 면제 후 교수로 임용된 사람도 있다 하니 후배들은 그들을 모델로 여기고 군 면제의 비급(祕笈)을 배우려 했다. 이번에 적발된 이들은 생활도 어려웠고, 2년간 군복무는 사형선고와 같아 피하고 싶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들은 사회의 약자를 이용해 해야 할 의무를 피해간 비겁한 자들이다.

게다가 이번 일을 계기로 아마 징병검사는 더욱 까다로워질 것이다. 그로 인한 피해는 연기력이 출중한 비보이들에게 가는 게 아니라, 정말 도움을 받아야 할 환자와 그 가족들이 겪을 것이다. 세상을 너무 쉽게 보지 말았으면 한다. 하기 싫은 일은 운 좋으면 틈새로 빠져나갈 수는 있다. 그 약삭빠름의 피해는 선한 다수가 받게 된다. 그래서 나는 화가 난다.

하지현 건국대 의대 교수·정신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