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시고 춤추는 게 파티? 파티는 낯선 사람과의 어울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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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호 20면

“남자는 연미복에다 여자는 이브닝 드레스로 옷차림을 깨끗이 하고 찬란히 하며, 추운 철에는 누각에서 모이고 따뜻한 철에는 정자에서 모인다. 밤이나 낮, 약속한 시간에 모여 춤추기 시작한다.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을 음악으로 조절하는데, 둘씩 둘씩 소매를 맞대고 나란히 나아가기도 하며, 넷씩 넷씩 손을 잡고 돌아서면서 여덟 사람이 대오를 이루어 나누어졌다가는 합치고, 합쳤다가는 나누어지기도 하니, 꽃송이가 구름처럼 엉킨 모습이 아니면 새가 날개를 펼친 듯하다 … 서양 풍속에는 본래 (우리나라처럼) 남자 춤이나 여자 춤을 직업적으로 추는 자가 따로 없고, 부귀한 집안 자녀라도 모두 춤을 배우므로, 꽃피는 아침이나 달 밝은 밤 같이 좋은 철에는 서너 명이 모이는 작은 모임에서도 흥취를 이기지 못하여 춤을 추고, 혼자 습관으로 춤을 추는 자도 있다.”

1880년대 조선 최초로 미국유학을 다녀온 개화사상가 유길준이 서양의 무도회를 소개한 대목입니다. 앞서 역시나 조선 최초로 일본유학을 경험했고, 미국을 거쳐 유럽까지 다녀온 유길준은 서양의 각종 제도만이 아니라 생활풍속에 대해서도 보고 들은 바를 풍부한 설명으로 남겼습니다. 그가 1895년 펴낸 서유견문의 ‘놀고 즐기는 모습’이라는 항목에는 무도회를 비롯, 다회·야유회·음악회 등이 소개됩니다. 각종 모임이 이처럼 활발한 데 대해 그는 “서양에서는 집회하는 명목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다”고 썼습니다. 서유견문은 본래 국한문혼용체로 쓰였습니다. 글머리 인용한 문장은 연세대 국문학과 허경진 교수가 우리말로 옮긴 서유견문(서해문집)에 실려 있는 표현을 따른 것입니다.

115년 전 유길준이 묘사한 무도회 풍경은 ‘파티’라는 말에서 지금 사람들이 연상하는 것과 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파티라고 하면 숱한 할리우드 영화에서 본 대로, 잘 차려입은 모습부터 떠올리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물론 드레스코드가 정해진 파티도 있습니다만 옷차림을 파티의 핵심이라고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또 1960~70년대 대학가 축제의 주요 행사였던 쌍쌍파티처럼 청춘남녀의 만남을 연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성 간의 만남만이 파티일 리는 없죠.

문자 그대로 옮기면 파티는 잔치나 모임입니다. 돌잔치·회갑연·결혼피로연에서 직장의 회식·동창회 등등 우리네에게 익숙한 갖은 행사를 다 파티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파티든 잔치든 빠질 수 없는 것이 먹고 마시는 음식입니다. 개화기 서양 외교관·선교사 등을 통해 서양음식과 함께 서양식 사교문화도 이 땅에 전파되기 시작했으리라고 유추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호서대 식품영양학과 정혜경 교수는 “신학문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에서 서양식 조리법도 가르쳤다”고 말합니다. 1896년 독립신문에 실린 기사에는 배재학당 학생들과의 모임에 영어학교 학생들이 서양요리 등을 많이 만들어 ‘손님대접을 매우 잘하였다더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음식에 더해 파티에는 음악도 있습니다. 음악이 중요한 건 요즘의 클럽파티만이 아닌 모양입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주영하 교수는 “조선시대 왕실의 공식연회에는 반드시 춤과 음악이 곁들여졌다”고 지적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봤습니다. 대한제국 시절인 1902년 고종이 베푼 기로연, 즉 나이든 신하들을 위한 연회도 그랬더군요. 음식상과 술을 올릴 때마다 ‘여민락’ ‘장춘불로곡’ ‘천년만세지곡’ 수여제천지곡 등 음악과 ‘몽금척’ ‘봉래의’ 등 춤이 여럿 나옵니다. 이 자리에서 고종이 한 말에 따르면 이런 잔치에는 “음식을 내리고 음악을 내려주는 것”이 규례라고 합니다.

물론 음식·음료·음악이 파티의 전부는 아닙니다. 제일 중요한 건 사람들이죠. 파티에서 자리 배치에 주최자가 신경을 쓰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이화여대 김은실 (인류학·여성학) 교수는 최근 국내에 파티문화가 확산된 것을 ‘동년배 문화’와 연관 지어 바라보기도 합니다. 이런 해석은 직장인들의 회식자리, 즉 대개 참석자 중 가장 상사인 사람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모임과 스탠딩 파티 같은 다면적 만남이 요구되는 모임을 비교하면 이해가 좀 더 쉬울 듯합니다. 사실 이런 이유로 파티라는 형식이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낯선 사람과도 대화를 이어가야 하니까요. 반면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노는 자리에도 손쉽게 파티라는 이름을 붙이는 젊은이들도 있습니다. 신제품 출시 같은 홍보행사를 파티로 여는 기업도 많습니다. 비즈니스의 일환이기는 하되 참석자들이 먹고 놀 수도 있는 자리라는 점에서 ‘신제품 발표회’보다는 덜 딱딱한 셈이죠.

유길준은 서유견문에 서양의 ‘놀고 즐기는 법’을 소개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사람들은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고, 한가하게 쉬는 것은 좋지 못한 습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나 한가하게 쉬는 것이나 각기 의미가 있다. 사람이 부지런히 일만 하면서 규칙적으로 섭생하지 않고 경영하는 일에만 밤낮 분주하게 열심이라면, 주색이나 잡기에 빠진 자와 다를 바가 없다.” 좋든 싫든 사교의 방식, 행사의 방식으로 파티와 공존하게 된 세상입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은 여기에도 해당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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