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6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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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기회를 주신다면 바다 속에 깃들어 있는 각종 보배와 수미산의 진귀한 보물을 캐내어 가져오겠다는 장보고의 말은 가히 폭탄적인 선언이었다. 흥덕대왕을 비롯하여 전 중신들은 장보고의 말에 숨 죽여 귀를 기울였다.

"하오나 대왕마마."

장보고가 허리를 공손히 구부렸다가 펴면서 두 손을 내려 읍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천수관음의 바다에도 마귀가 없는 것은 아니나이다."

"그 마귀가 무엇인가."

흥덕대왕이 물었다.

"폭풍우인가, 미친 바람인가."

"아니나이다."

장보고가 다시 대답하였다.

"물론 바다 위에 부는 미친 바람과 성난 파도(疾風怒濤) 역시 마귀임에는 틀림이 없사오나 그보다 더한 마라(魔羅)가 해인삼매의 바다를 더럽히고 있사옵나이다."

"질풍노도보다 더한 마군이 도대체 무엇인가. 바다를 더럽히는 마라가 무엇인가."

정색을 한 얼굴로 흥덕대왕이 물었다. 그러자 장보고가 대답하였다.

"바로 해적(海賊)이나이다."

해적. 배를 타고 다니면서 항해하는 다른 배나 해안지방을 습격하여 약탈하는 도둑을 가리키는 해적. 장보고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마디의 말이 전 군신들의 머리를 끄덕이게 하였다. 장보고의 말은 사실이었던 것이었다. 그 당시 온 조정에서는 해적이야말로 최고의 골칫덩어리였던 것이다.

그 무렵 당나라에서는 노예무역이 성행하고 있었다. 특히 영리하고 일을 잘 하는 신라노(新羅奴)의 인기는 대단해서 당나라 곳곳에서 가장 비싼 값으로 매매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신라와 당나라와의 공무역 교역품 중 신라에서 수출되는 중요한 상품 중에는 노비가 어엿한 품목으로 자리 잡고 있을 정도였던 것이었다.

특히 흥덕대왕의 선왕이었던 헌덕왕(憲德王)때에는 기근이 심하여 자손을 팔아서 연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3년 봄(821년)에 백성들이 기근으로 인하여 자손을 팔아서 자활하는 자들이 있었다."

아마도 이들은 중국의 노예상인들에게 넘겨져 중국에서 신라노로 팔려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신라 양민들을 사서 중국으로 노예를 팔아넘기는 중국의 무역상들의 노예무역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장보고가 말하였던 것처럼 해적들이었던 것이었다.

이들은 주로 무장한 병력을 거느리고 해상에서 다른 배들을 약탈해서 물건을 빼앗기도 했지만 그 보다 더 큰 이익을 남기는 노예를 약매(掠賣)하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던 것이었다.

주로 신라인들을 납치해서 노예로 팔아넘기는 행위는 중국의 해적선에 의해서 자행되고 있었고, 드물게는 일본의 왜구나 심지어 한반도 서남해 연안지대나 혹은 도서지방에 기반을 둔 신라의 해상세력가들에 의해서도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치 오늘날 마약이 큰 이익을 남기는 범죄조직의 중요한 자금줄인 것처럼 당시에는 노예무역이 가장 큰 이익을 남기는 해적들의 자금원이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그 무렵 당나라와 신라와 일본을 잇는 바다에는 노예무역을 주업으로 하는 해적선이 엄청나게 난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실제로 '일본후기(日本後記)'에는 '811년 신라의 양식을 운반하는 운량선인(運糧船人)들이 해적선들에게 약탈 당하여 일본에 표착(漂着)하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을 정도였던 것이었다.

신라의 조정에서도 해적들에게 강제로 납치되어 불법으로 당나라의 노예로 팔려나가는 신라노에 대해서 이 문제를 중대시하고 당나라 조정에 신라인을 노예로 사고 파는 행위를 단속시켜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한 적이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신라가 숙위왕자(宿衛王子) 김장렴(金張廉)을 통해서 이를 정식으로 요청하자 당나라의 조정에서는 816년 신라인 노예인 생구(生口)를 사고 파는 행위에 대해서 금지령을 내린 적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된 당나라에서 중앙 조정으로부터 내려온 금지령이 제대로 지켜질 리 없었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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