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소프트 겹겹 방어벽에 M&A 또 발목…오라클 '가슴앓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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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피플소프트를 강제로 인수합병(M&A)하려는 오라클의 야심이 피플소프트의 M&A 방어벽에 걸렸다. '독약(poison pill)'으로 불리는 이 방어벽은 피플소프트의 회사 정관에 포함된 다른 기업이 자사 주식의 20% 이상을 매입하면 자동으로 그만큼의 신주가 발행되도록 한 규정을 말한다. 다른 기업에 경영권이 넘어가는 상황을 막기 위해 이런 규정을 만든 것이다.

오라클은 피플소프트 경영진이 M&A 제의를 계속 완강히 거부하자 지난 19일(현지시간) 마지막 수단으로 피플소프트 주주들의 의사를 타진했다. 주당 24달러씩 총 88억달러에 회사를 인수하려고 하는 데 응하겠느냐고 물은 결과 60.8%의 주주들 지지를 얻어냈다. 그런데도 정관에 명시된 포이즌 필 규정에 걸려 오라클의 최고경영자(CEO) 래리 엘리슨은 아직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오라클은 문제의 포이즌 필 규정이 피플소프트 주주들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라며 석 달 전 델라웨어 법원에 제소했다. 이 판결은 24일 나올 예정이다. 판사가 오라클의 손을 들어주면 사태는 종결된다. 그러나 피플소프트의 손을 들어줄 경우 오라클은 피플소프트 주주들을 움직여 내년 주총에서 M&A에 우호적인 이사회를 구성한 뒤 문제를 풀어야 한다.

미국 내 최대 기업용 소프트웨어 회사인 오라클의 최고경영자(CEO) 래리 엘리슨은 지난해 6월 강력한 경쟁자인 피플소프트에 적대적 M&A를 선언했다. 피플소프트가 동종업계의 JD 에드워즈를 인수하면서 미국 내 1위로 올라서자 이 같은 강수를 둔 것이다. 오라클은 당초 주당 16달러의 인수가격을 제시했으나 피플소프트 측이 계속 거부하자 몇 차례에 걸쳐 가격을 높여왔다.

피플소프트 이사회는 현재의 가격(주당 24달러)도 너무 낮다며 여전히 합병을 거부하고 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이들은 무엇보다 오라클에 인수되는 순간 피플소프트란 회사는 사라지며, 자사의 소프트웨어를 산 기업들은 큰 피해를 보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다수의 주주가 허락한 M&A를 경영진이 언제까지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아무리 포이즌필 규정이 있다고 해도 회사의 주인인 주주들이 회사 매각에 찬성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판단할 때 대세는 오라클 편으로 보인다. 피플소프트 주주들의 지지를 얻은 데다 지난달엔 유럽연합(EU)에서 이 M&A가 EU의 관련 법률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판정도 받았다. 지난 9월 샌프란시스코 연방법원은 오라클의 피플소프트 인수는 반독점법을 위반하는 것이라는 미 법무부의 제소에 대해 그런 문제가 없다며 오라클의 손을 들어줬다.

두 회사가 싸움을 하는 동안 같은 업종의 세계시장 점유율 1위 기업인 독일의 SAP만 재미를 봤다. SAP의 사무용 소프트웨어 세계 시장 점유율이 54%로 뛰었고, 지난 3분기 순이익이 3억6600만달러로 지난해 동기에 비해 15% 늘었다.

반면 피플소프트 순이익은 전년 동기의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회사 측은 고객들이 곧 사라질 회사의 소프트웨어를 구입하길 꺼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뉴욕=심상복 특파원

◆ 포이즌 필(Poison pill)=기존 주주에게 신주를 싼값에 부여하는 등의 방법으로 적대적 M&A를 막는 것. 기업가치를 떨어뜨릴 위험이 크다는 점에서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극약' 처방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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