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미래는 밝다, 스스로 세상의 리더가 되려 한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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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미래학계의 대부로 꼽히는 짐 데이터(77) 미국 하와이대 교수 겸 미래학연구소장이 바라보는 21세기 진단은 어떨까. 그는 1977년 앨빈 토플러와 함께 대안미래연구소를 설립했고, 세계미래학연맹(WFSF)의 사무총장과 의장을 역임한 미래학 1세대다. 지난달 말 호놀룰루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하와이대 연구실에서 두 시간 동안 얘기를 나눴다.



그는 80세가 멀지 않은 고령이지만, 몸도 마음도 나이를 잊은 지 오래돼 보였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독특한 바가지 머리, 검정 할리데이비슨 티셔츠, 진 바지, 목이 긴 캔버스화는 40대 초반인 기자도 소화하기 어려운 복장이다.

한국의 미래는

● 지난해 11월 한국에 아이폰이 출시되면서 모바일 혁명의 거센 물결이 한국을 휩쓸고 있다. 삼성·LG 같은 한국 업체의 위기론까지 나온다.

“걱정할 필요 없다. 당연한 경쟁의 과정일 뿐이다. 어떤 제품이든 성장과 쇠락의 길을 걷는다. 최근 아이폰 열풍은 한국인의 특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인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데다, 스타일리시하고 새로운 것에 열광하는 성향이 많다. 일종의 유행이라고 여겨진다. 몇 개월이 지나면 좀 달라질 것이다. 한국 기업이 계속 연구개발에 대한 노력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면 아이폰 쇼크는 충분히 이겨나갈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애플의 아이폰과 컴퓨터가 기존 PC, 스마트폰보다 우수한 건 사실이다(그는 자신도 얼마 전 한국산 휴대전화에서 아이폰으로 바꿨다고 했다).”

● 요즘 한국엔 스마트폰과 더불어 트위터·페이스북 등이 인기다. 이 같은 모바일 환경이 기존 웹 혁명처럼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당연히 그렇게 될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모든 것이 하나의 조그만 모바일 장비로 수렴될 것이다. 종이책도 없어지진 않겠지만 한계상황으로 내몰릴 것이고, 대부분 킨들이나 아이패드 같은 장비를 통해 독자에게 다가갈 것이다. 나를 비롯한 많은 미래학자는 이미 1970년대부터 미래의 모바일 환경을 예측해 왔고 21세기 들어 현실이 됐다. 그때는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다.”

● 한국의 미래는 북한을 떼놓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 같다. 통일 방식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북한이 한국의 미래에 아주 큰 변수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초계함 침몰 사건과는 별도로 한국은 지금 다른 어떤 대안보다 좋은 통일의 기회를 맞고 있다. ”

● 남북 통일이 언제쯤 이뤄질 것으로 보나.

“ 당신의 시대에는 이뤄지지 않겠나. 나의 시대는 아니겠지만(웃음).”

● 한국은 지금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이다. 인구는 곧 국가의 미래와 직결된 것인데.

“인구 감소는 바람직한 현상이다. 지구상에는 한정된 자원과 기술 수준에 비해 너무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 10억~30억 명 정도가 적당하다(현재 세계 인구는 약 68억 명이다).”

● 인구감소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물론 걱정해야 한다. 하지만 경제 성장에 바탕을 두지 않은 다른 경제 시스템을 만들어 내는 것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사고를 완전히 바꿔봐라. 경제가 계속 성장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면 인구가 늘어나야 할 이유가 없다. 성장주의 경제정책은 세계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이제는 인구 감소라는 현실을 기쁜 마음으로 껴안아야 할 때다.”

● 당신이 말하는 미래를 위협하는 위기, 즉 ‘쓰나미(tsunami)’ 중 대표적인 것이 ‘석유 위기’인 것 같다. 한국처럼 천연자원 없이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는 석유 위기가 치명적인데.

“그렇다. 석유자원은 한정된 것이다. 어느 순간 절반 이상 써버리고 나면 그때부터는 채굴하기도 어렵고, 점점 더 비싸질 수밖에 없다. 이건 논쟁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언제 ‘피크 오일’(석유 생산이 최고 정점에 이르는 순간)이 올 것이냐는 것이다. 내 판단에는 인류는 이미 피크 오일을 넘어서 내리막길로 달려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최근 기름값이 비교적 안정된 것은 세계 경제위기로 수요가 일시적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위기가 지나고 나면 기름값은 다시 올라갈 수밖에 없다. 한국도 이런 시대에 제대로 대비하려면 빨리 새로운 에너지원을 찾아야 한다.”

● 당신은 한류를 예로 들면서 한국이 드림 소사이어티(Dream Society)에 가장 근접한 국가라고 했다. 한국의 미래는 정말 밝은가. 한류란 것도 일시적 현상일 수 있지 않나(데이터 교수는 2004년 자신의 한국인 1호 제자인 서용석 박사와 함께 쓴 논문에서 정보사회 다음에는 이미지와 꿈이 우선시되는 드림 소사이어티가 올 것이며 한국은 정부가 한류를 지속적으로 이끌어가는 유일한 국가란 점에서 1호 드림 소사이어티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맞다. 한국의 미래는 밝다. 단 (미국처럼) 앞서간 국가를 따라 하지 않고 스스로 세상을 이끄는 리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말이다(그가 크게 웃었다. 그는 미래에 대한 단정적 예언을 싫어한다). 영화와 드라마란 측면에서 보면 미국과 일본, 홍콩 등이 한국보다 먼저 드림 소사이어티에 다가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나라는 결정적 고비를 넘지 못했다. 한국은 정부가 주도해 한류를 지속적으로 이끌어가는 유일한 나라라는 측면에서 앞선 다른 나라가 넘지 못한 고비를 넘을 것이라 생각한다.”

세계의 미래는

● 평소 미국의 미래에 대해 어둡게 얘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 달이 차면 기울게 마련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제국(empire)도 물론이다(그는 미국을 제국에 비유했다). 미국의 미래는 암울하다.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은 환경, 에너지 위기 등 다가올 미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대한 보고서도 마련했었다. 하지만 레이건 정부(1981~89)가 들어선 이후 미국은 미래에 대한 경고에 귀를 닫았다. 자원을 낭비하고 미래에 대비하지 않았으며 최근 경제위기 직전까지 미래에 대한 경고를 무시해 왔다. 비록 군사적으로는 여전히 강력하지만 이젠 더 이상 제국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다.”

● 이젠 서구의 시대가 가고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전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20~30년 전이라면 그 전망이 맞을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지금처럼 세계가 성장 일변도로 달린다면, 중국과 인도 등도 미국처럼 석유 고갈과 환경오염, 지구온난화 등의 문제로 심각한 위기에 빠져들 수 있다.”

● 그럼에도, 세상은 궁극적으로 변해 가는 모습이 있지 않을까.

“로봇과 인공지능 등이 인간이 하던 일을 지속적으로 대체해 나갈 것이다. 그간 인간이 해왔던 것을 그들은 더 빨리, 더 정확히, 쉼 없이, 지치지 않고 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그 같은 존재에 점점 더 많이 의지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생물학적·생의학적 기술이 발전하면서 어떤 인간은 사실상 로봇과 구분이 없어지는 등 다양한 형태의 지적 존재가 생겨날 것이다. 아마도 이 세기가 끝나기 전에.”

● 당신은 인류가 화성으로 이주하는 시대도 전망하고 있다. 일반인이 느끼기에 황당할 수 있다.

“실제로 유럽과 중국·인도 등 세계 곳곳에서 21세기 이내를 목표로 이런 준비를 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문제는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는 것인데, 결국 인간이 석유 고갈과 환경오염, 지구온난화 문제를 어떻게 슬기롭게 넘어가느냐에 따라 화성 이주 시기는 달라질 것이다.”


짐 데이터

괴짜다. 아니 스스로 괴짜(crackpot)라고 불리길 원한다. 미래학자는 괴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창의적인 미래학자(futurist)가 되려면 무엇이든 기존 사고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일단 그의 용모. 사진만으로 언뜻 봤을 땐 ‘뚱뚱한 할머니’로 오해할 수 있을 정도다. 턱수염 흔적도 찾아보기 어려운 매끈한 피부에 어깨까지 찰랑거리는 회색 단발머리다. 평생을 고수해 온 스타일이다. 그의 자가용은 30년 된 구형 400cc 혼다 모터사이클이다. 복장이 항상 티셔츠에 진, 운동화인 이유다. 연구실에 들어올 때면 항상 까만 헬멧을 왼쪽 옆구리에 끼고 ‘헬로~’를 외친다.

살아온 궤적도 유난스럽다. 미래학자가 된 바탕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성(Dator)이 어디서 온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다고 했다.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할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사했고, 증조할아버지는 장님이었다는 것이 유일한 부계의 기억이다. 모계 쪽도 별반 차이가 없다. 모친의 조부가 고아였다. 아홉 살 이후론 어머니와 이모, 할머니 등 여자밖에 없는 집에서 자라났다. 이런 배경 때문에 어린 시절 그는 또래집단에 섞이지 못하고 외톨이로 지냈다고 한다. 그는 “나는 아이였던 적도, 남자였던 적도 없었다. 그냥 한 명의 ‘인간’이었다. 남자가 없는 집안에서 삶을 꾸려가야 했다. 나에겐 과거도 전통도 없었고 오직 미래만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인종차별이 심하고 보수적인 플로리다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가부장적 전통을 배운 것이 없기 때문에 고정관념의 틀에서 자유로웠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호놀룰루=최준호 기자, 하와이 미래학연구소 방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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