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미래가 보이는 마당] 쌍방향의 신바람 '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미셸 세르의 파라지트(기생충, 잡음)의 이론처럼 인간의 모든 시스템에는 반드시 기생물(寄生物)과 '잡음'이 붙어 다니게 마련이다.

한국의 '판 문화'는 그것을 배제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포용하고 있는 데 그 특성을 갖는다.만약에 단원의 그 그림에서 엿장수를 지워버린다면 그 씨름판은 얼마나 싱겁고 썰렁해 보이겠는가.

그것이 저토록 생동감을 일으키는 것은 단원이 '씨름꾼'이 아니라 '씨름판'을 그려주었기 때문이다.…

그 씨름판을 그대로 소리판으로 옮기면 한국 고유의 판소리가 될 것이다. 씨름꾼은 소리꾼이 되고 구경꾼은 청중이 된다. 그리고 엿장수의 역할을 더 강화한 것이 북 장단을 치는 고수(鼓手)다.

판소리는 소리를 부르는 사람과 듣는 사람, 그리고 그 사이에 앉아 있는 고수가 한데 어울려 벌이는 소리판이다. 그래서 아무리 명창이라도 혼자서 놀려고 하면 판은 깨지고 만다. 독재자와 독선적인 정치가가 독판을 치고 다닐 때 정치 판이 깨지는 것과 같다. …

씨름꾼과 구경꾼이 그리고 엿장수까지도 모두가 둥글게 둥글게 하나가 되는 세상, 그 판 문화의 원 풍경 속에 우리 미래의 마당이 보인다. 그런데 명창도 많고 구경꾼도 있는데 지금 고수가 없다. 판을 만드는 고수의 북 장단이 없다.

무의식적으로 잘 쓰고 있는 말에 '판'이라는 것이 있다. 외국어로는 번역하기 힘든 한국 특유의 말이다.'정치'라고 하면 막연하게 들리다가도 거기에 판자를 붙여 '정치 판'이라고 하면 금세 생생한 정치상황이나 어떤 분위기가 떠오른다.

외국 TV의 와이셔츠 광고에 등장했다는 국회의원들의 싸움판처럼 구체적인 영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렇게 신기한 효과를 일으키는 '판'이란 대체 무엇인가.

국어사전보다는 씨름판을 그린 단원(檀園)의 그림을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림 한복판에는 가위표 모양으로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는 씨름꾼이 있고 그 둘레에는 동그랗게 에워싼 구경꾼들이 앉아 있다. 제각기 다른 모습, 다른 표정이지만 그 시선은 일제히 씨름꾼 한 군데로 쏠려 있다.

그래서 그 씨름판은 차축(車軸)을 향한 수레바퀴 살처럼 팽팽한 구도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씨름판은 단순히 씨름을 하는 물리적인 모래판(마당)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씨름꾼과 구경꾼이 함께 만들어내는 게임 전체의 흐름과 승패를 나타내는 소프트 파워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아니다. 판은 씨름꾼과 구경꾼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으레 이런 판에는 단원의 그림에서처럼 엿장수까지 한몫 끼어든다. 엿장수의 시선은 구경꾼들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향해 있다. 그의 관심은 씨름꾼보다는 엿을 팔 구경꾼들에게 있다.

그래서 그의 모습은 관객들과는 전연 딴판이지만 실제로 가장 살 판을 만난 것은 다름아닌 엿장수다.

그리고 그 판을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가 되기도 한다. 엿장수의 가위소리는 씨름판의 흥을 한결 달굴 수도 있고 거꾸로 판을 식히고 깨는 방해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셸 세르의 파라지트(기생충, 잡음)의 이론처럼 인간의 모든 시스템에는 반드시 기생물(寄生物)과 '잡음'이 붙어 다니게 마련이다.

한국의 '판 문화'는 그것을 배제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포용하고 있는 데 그 특성을 갖는다.만약에 단원의 그 그림에서 엿장수를 지워버린다면 그 씨름판은 얼마나 싱겁고 썰렁해 보이겠는가.

그것이 저토록 생동감을 일으키는 것은 단원이 '씨름꾼'이 아니라 '씨름판'을 그려주었기 때문이다. 씨름꾼들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그리고 구경꾼들은 그 씨름꾼을 보고 엿장수는 그 구경꾼을 바라본다. 이중 삼중의 서로 다른 시선들이 교차해가면서 기묘한 리듬과 구도를 자아낸다.그렇게 해서 한국의 판 문화는 태어나는 것이다.

그 씨름판을 그대로 소리판으로 옮기면 한국 고유의 판소리가 될 것이다. 씨름꾼은 소리꾼이 되고 구경꾼은 청중이 된다. 그리고 엿장수의 역할을 더 강화한 것이 북 장단을 치는 고수(鼓手)다. 판소리는 소리를 부르는 사람과 듣는 사람, 그리고 그 사이에 앉아 있는 고수가 한데 어울려 벌이는 소리판이다.

그래서 아무리 명창이라도 혼자서 놀려고 하면 판은 깨지고 만다. 독재자와 독선적인 정치가가 독판을 치고 다닐 때 정치판이 깨지는 것과 같다. 귀 명창이라는 말이 있듯이 좋은 청중이 있어야 비로소 제소리를 내는 것이 판소리다.

그래서 부르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판을 만들어 주는 것이 고수의 힘이다. 고수는 잠시도 소리꾼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 호흡과 장단을 맞춰주는 일을 한다.

그러면서도 결코 관중에게 뒤통수만 보이고 지휘봉을 흔드는 현악단의 콘덕터와는 구별된다. 고수는 소리꾼만이 아니라 듣는 사람들 편에서도 북을 치고 추임새를 하기 때문이다.

결국 판소리는 문자 그대로 '판에서 나오는 소리'다. 그래서 고수는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명창과 청중을 제치고 아랫목 차지를 한다. 그것을 판소리 판에서는 '일 고수, 이 명창, 삼 청중'이라고 한다.

안숙선 국창이 언젠가 인터뷰에서 판소리를 부를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오페라 청중이라고 한 적이 있다. '무대'는 있는데 '판'은 없었기 때문이다.

관현악이든 오페라든 최상의 청중들이란 연주를 하는 동안 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악장과 악장 사이에는 박수가 아니라 사방에서 참고 있던 기침소리가 터져나온다.

관객은 고사하고 민감한 지휘자들은 연주자들의 악보를 넘기는 잡음까지도 없애기 위해 종이 대신 실크나 비닐로 된 악보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요즘 정보용어로 말하자면 관현악이나 오페라는 노이즈를 철저하게 제거한 일방통행적 소통이라고 한다면 판소리는 인터랙티브의 쌍방향 소통의 소리-노이즈까지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소리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판 문화'는 '개인주의'나 '집단주의'의 잣대로는 잴 수가 없다. 굳이 정의하자면 그런 대립개념에서 벗어난 '상호주의'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판 문화는 독립성(인디펜던스)과 의존성(디펜던스)의 틀을 뛰어넘은 상호의존 관계(인터디펜던스)로 이룩된 21세기 네트워크 사회의 특성과 비슷한 데가 많다.

인터넷에 접속해 수시로 자료를 교환하고 채팅을 하고, 웹사이트에 커뮤니티를 만드는 사이버 공간이야말로 정보시대의 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인터넷은 내 것도 아니며 어느 집단의 것도 아니다. 클릭 하나로 판이 만들어지고 클릭 하나로 판이 사라진다.

러브 바이러스처럼 한 사람의 힘으로 판 전체를 깰 수도 있으며 리누스처럼 프로그램의 소스 공개로 인터넷 전체에 새 판을 벌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인터넷은 산업주의시대를 지배해온 관료주의 조직과는 아주 다르다. 앨빈 토플러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관료제에 대응하는 애드호크래시(임시조직)이다.

그리고 그것을 한국말로 옮기면 바로 '판'이란 말이 된다. 그렇다. 한국말의 '판'과 인터넷의 '인터'는 서로 닮은 데가 많다. 그것은 말 머리나 꼬리에 붙어서 서로 다른 것들이 관계를 맺고 어울리는 신개념을 낳는다.

한마디로 판이란 그때그때 벌이는 임시적인 조직이며 자연발생적인 공동체 모임이다.

소리에 판자가 붙으면 판소리가 되듯이 돈에 판자가 붙게 되면 '판 돈'이 되는 것과 같다.

판소리가 소리꾼 한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판 전체의 소리, 공유의 소리이듯이 판돈은 각자의 돈이면서도 동시에 판 전체를 만들어내는 '공동의 돈'(자본)이다. 그래서 출자(出資)와 마찬가지로 판돈은 '낸다'고 하지 않고 '댄다'고 한다.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판은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을 나타내는 단위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한판''두판'이라고 할 때처럼 판 위에 숫자를 붙이면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횟수나 순서를 뜻하는 말이 된다.

일본씨름(스모)은 단판 승부지만 한국의 씨름은 대개가 삼세판으로 이어진다. 판은 연결되고 지속하고 반복한다.

그러고 보면 국토라는 공간의 판과 역사라는 시간의 판에 의지하며 살아 온 것이 우리 한국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런데 한국인들을 하나가 되게 하는 이 판 문화가 점차 비속한 것으로 추락해가면서 '판'자는 부정적인 말을 나타내는 접미사로 변해가고 있다.

섰다판.술판.노름판처럼 판자가 붙은 것 치고 온전한 것이 없다. 정치에 판이 붙어 정치판이 되면 싸움판, 모략판이 되고 선거에 판이 붙어 선거판이 되면 먹자판, 욕판이 된다.

판이 그 질서를 잃을 때 연예인들의 판은 딴따라판이 되고 시장판은 난장판이 되고 신성한 노동판은 노가다판 같은 상말이 되고 만다.

판은 잡다한 사람들이 모여 끈끈한 시선이 교차되는 통합의 자리이고 입장이 다른 사람들이 어울려 서로 장단을 맞추는 동질성을 이루는 장이다. 누군가 혼자서 판을 치게 되면 그 판은 금방 '독판'이 된다.

상호성과 다양성, 그리고 엿장수 가위의 잡소리까지도 흥겹게 울리던 판 문화의 질서는 무참히도 깨지고 만다.

막판에 남는 것은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아니면 광적인 집단주의다. 비속한 표현 그대로 '개판'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판 중에서 가장 무서운 '이판 사판'이 된다.

정 치판을 비롯해 모든 분야에서 판을 만들고 지키는 사람보다 판을 깨고 다니는 사람들이 득세를 하고 있다.

21세기 네트워크 문화를 가장 많이 닮은 한국의 '판 문화'가 제철에 꽃을 피워보지 못한 채 시들어가고 있다. 이러다가는 나라 전체의 판이 깨지고 만다.

'비단신이 없는 아이는 다리 없는 앉은뱅이를 만날 때까지 계속 운다'는 말이 생각난다. 판만 살아 있으면 언젠가 비단신을 신을 수 있는 날이 온다. 하지만 판 자체가 깨어지면 발 없는 사람처럼 비단신이 생겨도 신을 수 없게 된다.

씨름꾼과 구경꾼이 그리고 엿장수까지도 모두가 둥글게 둥글게 하나가 되는 세상, 그 판 문화의 원 풍경 속에 우리 미래의 마당이 보인다. 그런데 명창도 많고 구경꾼도 있는데 지금 고수가 없다. 판을 만드는 고수의 북 장단이 없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