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극단 '학전' 김민기 대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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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9면

전날 중국의 베이징(北京)에서 돌아온 김민기(50)씨는 기내식 외에 하루 종일 곡기를 거른 상태였다. 그동안 꽉 막혀 있던 긴장이 풀린데다 피로감이 쌓여 입맛이 떨어졌던 탓이다.

지난 20일 오후 서울 대학로 극단 학전 사무실에서 있었던 인터뷰는 이같은 '초죽음'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사진을 찍을 때 웃는 모습을 좀 보이라고 자꾸 채근하자, 그는 "휘발유가 떨어져서 힘이 없다"며 특유의 어린애 같은 미소를 지긋이 지어 보였다. 직원에게 '휘발유'를 부탁했다.

다짜고짜로 김씨는 이번 공연에서 깨달은 '비판적 한류론'으로 말문을 열었다. 이것은 '1970년대 운동권 가수' 운운하는 식의 정치색 짙은 표현에 염증을 내는 김씨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정치적' 발언이어서 기자는 좀 당황스러웠다.

중국 청년들이 가장 많이 본다는 북경청년보는 "(이 작품을 통해)한류(韓流)만이 한국문화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평을 한 바 있다.

"현지에서 한류의 실체를 보니, 이를 대단한 것으로 평가하는 정부 주도의 우리식 발상법은 위험하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만난 중국 지도부나 지식인들의 의견도 그런 것이었다. 그들은 한류를 일종의 '바이러스'로 보는 듯했다. 흔히 한류로 대표되는 중국의 대중문화는 랩이었는데, 그 가사는 옛날 우리의 건전가요 같았다. 한마디로 '옷'(형식)과 '속'(내용)이 안맞았다. 한류는 그저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돌출된 중국 젊은이들의 '정서의 변화' 정도로 보였다."

이윽고 주문한 '휘발유'가 나왔다. 김씨가 말하는 '휘발유'는 맥주. 그는 일할 때나 궁리 때나 맥주를 입에 달고 사는 맥주광인데,이 날도 맥주로 곡기를 대신했다.

평소 같으면 저음의 저속력이었을 터인데 김씨는 이날 인터뷰 중엔 격렬한 '굉음'도 냈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 중국을 평정하고 왔으니 감개무량함이 오죽했으랴. 김씨에게 그런 '오버'는 드문 일이었다. 차근차근 말을 들어보니 그 성과가 실감났고 그게 거품이 아니란 걸 알았다.

'지하철 1호선'은 지난 3~6일 상하이(上海), 13~17일 베이징 공연을 마치고 돌아왔다. 다음달에는 일본 공연길에 올라 도쿄(15~18일).오사카(20~21일).후쿠오카(24~25일) 등 3개 도시에서 공연한다. 지난 4월 원작의 고향인 독일 베를린 공연에 이어 계속되고 있는 해외 나들이다.

"원작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았던 베를린 공연과 마찬가지로 이번 중국 공연도 한국 공연사의 이정표를 세운 쾌거였다. 중국 공산당기관지인 인민일보와 북경청년보 등 언론들의 극찬 릴레이가 쏟아졌고, 소위 신좌파(新左派)들로부터는 "두고두고 연구해야 할 텍스트"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들은 김민기를 당대 인민(人民)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측면에서 '한국의 발자크'요, 서양의 판화기법을 역시 인민의 주체적 표현양식으로 승화시켰던 쑨원(孫文)에 빗대어 그에 필적하는 인물로 '신격화'하기도 했다.

인터뷰에서 밝힌 한류에 대한 김씨의 따끔한 충고 한마디. "본질에 대한 이해 없이 현상만 좇으며 정부가 나서 풀무질을 해대는 한류는 외교의 가나다도 모르는 잘못된 제스처다."

중국 언론의 대체적인 평가처럼, 이런 지적의 반대편에 서 있는 김씨의 '지하철 1호선'은 그럼 무엇인가. 이를 본 중국 관객들이 매회 만석의 틈에서 발견해 낸 '한류 그 이상의 것'에 대한 김씨의 진단은 이렇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 뮤지컬의 갈라 콘서트 정도를 체험한 중국인들에게 '지하철 1호선'은 일종의 '문화충격'이었던 것 같았다. 수차례의 토론회에서 만난 학자.평론가.영화감독들이 공통으로 하는 말이 그랬다.

그런 충격 이면에 그들의 고민이 도사리고 있었다. 하나는 지난 반세기의 혁명을 완성하고 난 뒤에 남은 상흔, 즉 전통문화에 대한 말살이었다. 다른 하나는 개혁개방 이후 서양 것을 부단이 모방했지만 주체적이지 못했다는 반성이었다. 그 사이 예술은 인민을 떠나 있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나 서구의 상업문화 모두가 그랬다."

국 관객들이 이 와중에서 만난 '지하철 1호선'은 위의 두가지 점을 충족시키는, 김씨의 표현대로 '선물'이자 '복음'이었다. 비록 한국의 이야기지만 그 속에 지금 인민의 이야기가 아주 주체적으로 녹아있는 것을 발견하고 열광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 작품은 서울 지하철 1호선을 배경으로 '하찮은' 인생들의 삶을 담았다.

또한 내용 못지 않게 형식도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김씨는 "그저 배우를 밝혀주는 게 조명의 몫이라고 생각했던 관객들에게 암전 상태에서 각 배우들에게 떨어지는 톱조명과 녹음이 아닌 라이브 연주는 경탄 그 자체였다"고 말했다. 그러니 "'지하철 1호선'은 중국 뮤지컬 발전의 새로운 전범"(인민일보)이란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번 '지하철 1호선' 초청자인 문화부 소속의 중국 대외연출 공사측에 따르면 그동안 중국의 공연사에서 표가 매진된 사례는 두차례 밖에 없다고 한다. 98년 러시아 키로프 발레단과 지난해 중국 출신의 쇼팽 콩쿠르 우승자(리윈디) 연주회가 그것. '지하철 1호선'은 이 흥행사(史)에 세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좀처럼 문화관련 기사를 다루지 않는 인민일보가 지난 16일자에 장문의 리뷰를 실은 것도 이례적인 일이다.

이같은 중국 열풍이 잦아들 즈음 '지하철 1호선'은 일본으로 간다. 이미 외국 문화에 닳고 닳은 일본은 분명 중국과는 다른 반응을 보일 게 뻔하다. 그러나 김씨는 중국 공연을 앞두고 그랬듯이 어떤 편견도 배제했다.

"미리 예견되는 결과는 없으나 새로운 것을 알게 될 것에 대한 기대감은 크다. 다만 초청자인 저팬 파운데이션의 연극 책임자인 유키 하타의 말처럼 '일본 공연계에 활력소'가 됐으면 한다. 서양 것의 완벽한 모방에 치중하는 시키(四季) 등의 뮤지컬과는 전혀 다른 '창조적 변용'의 모델로서 말이다."

김씨는 "그런 다양성의 충돌 속에서 '제3의 것'을 이끌어 내는 것이야말로 한.중.일 문화교류의 진정한 목표가 돼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차이의 문화'랄까. 삼국의 최대 공약수를 염두에 두고 보편성만을 추구하는 것은 문화와 예술의 갈 길이 아니라는 게 '문화 세계화'에 대한 김씨의 지론이다.

글=정재왈.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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