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가들 '문학제도' 자정 나섰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규범과 가치의 파탄에 호응이라도 하듯 문학계의 질서와 가치 판단도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신인등단 과정이나 문예지 운영, 문학상 시상의 문제점과 비평의 공정성 상실 등등 곳곳에서 '문학제도'의 기반을 파괴하는 사태가 점차 넓게 유포되고 있다.그 배경에는 문학권력에 대한 욕망과 상업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때 문학제도의 중심축이랄 수 있는 문학평론가들의 단체인 한국문학평론가협회(회장 홍기삼)는 지난 17~18일 '한국적 문학 제도의 재인식'이라는 학술회의를 열었다. 이번 회의에서는 신인등단제.비평의 행태.문학저널리즘 등 문학 제도에 대해 문단 사상 최초로 폭넓게 따졌다.

문학평론가 정현기(연세대 교수)씨는 "모든 문인들은 가장 강력한 정부를 자신의 문학행위 속에 만들기를 꿈꾼다"고 전제했다.

문학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문인의 백성이어서 많은 독자들을 거느린 작가일수록 강력한 의견몰이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고 그것에 의해 또 다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문인들이 매체로 이용하는 신문.문예지.출판사,그리고 문학단체 등이 문학제도의 주류를 이룬다.

정씨는 한국의 이러한 문학제도는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왕성한 조직력을 과시하고 있다고 보았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을 때도 앞장서 민족의 정신과 언어를 지켜냈고 독재시대에도 문학제도는 민중의 권능을 대신하는 하나의 빛이었다. 민족의 정신을 담는 언어보관 창고의 문지기 역할에 충실했던 우리의 문학제도가 이제 권력욕과 상업주의에 함몰돼 타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명재(중앙대 교수)씨는 "장래의 문학 역군을 뽑는 문인선발제도가 올바르지 못할 경우 문단은 스스로 격하하여 침잠한다"며 무분별한 신인 양산을 비판했다.

동인제.신춘문예.추천제.신인문학상 등 신인등단 제도를 살펴본 이씨는 "문인이 희소가치의 권위를 누리던 시대는 지났다"며 "문인들 스스로 양식을 가지고 선비답지 않은 신인 양산 행위를 삼가야 하며 함량 미달의 신인은 엄정한 평가로 철저하게 배제해 사이비문인이 도태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학평론가 오양호(인천대 교수)씨는 자신의 패거리만 키우는 유파 비평, 작품 평가의 기준과 비평가의 수준이 문학작품과 독자를 이어주고 이끌어야 할 문학평론의 문제라고 보았다. 이 문제에는 물론 문단 권력과 상업성이 바탕에 깔려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오씨는 특히 대학교수들의 강단비평에 주목했다.

대학교수들이 너도나도 문학 현장으로만 내몰리지 말고 문학평가의 객관성.보편성 탐구의 전범을 보여 현장비평을 올바로 이끌어달라는 것이다.

1990년대 후반 들면서 문학제도의 혼탁상이 시정잡배의 흥정보다 더 심하다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일기 시작했다.

신인등단은 물론 출판, 일부 문학상까지 돈과 정실.인연으로 거래되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 문학제도의 중심인 문학평론가들이 이런 현실을 직시, 자성하고 있어 영상과 오락에 밀려 가뜩이나 위축되고 영향력 또한 추락하고 있는 한국문학의 자정력과 추진력 회복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이경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