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과학] '불량국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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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미국의 비판적 지성으로 첫 손 꼽히는 촘스키(MIT대 ·72)교수가 미국을 '불량국가' 의 명단에 등재시켰다.

촘스키 교수가 지난해 펴낸 신간 '불량국가' 에서 미국은 세계경찰이란 우월적 명칭 대신 국가 이익을 위해 국제기구의 보편적 합리성을 훼손하는 나라로 묘사된다.

“국제기구가 미국의 이익에 봉사하지 못할 때 그러한 국제기구가 존재하도록 내버려둘 이유가 없다는 것이 미국의 일반화된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30여 년 간 미국의 외교정책을 집요하게 비판해 온 촘스키 교수의 수십 권 저서를 관통하는 정신은 어떤 특정의 이념이 아니다.

촘스키 교수에게 직접 지도를 받고 이 책을 번역한 장영준(중앙대 영문과)교수의 지적처럼 모든 형태의 억압에 반대하는 '반(反)억압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이념의 대결과 냉전의 해소에 관계없이 촘스키의 사상적 생명력을 유지시키는 비결로 보인다.

물론 그의 이론은 "국제 사회의 역학관계를 무시하고 유엔이나 국제 사법재판소 같은 중재기관에 호소하는 유토피아적.법률주의적 수단을 옹호한다"며 비웃음을 받기도 한다.

촘스키는 불량국가의 의미를 두 가지로 정의한다. 하나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라크.리비아.쿠바.북한 등인데, 이것은 강대국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 국가들에 적용하는 좁은 의미다.

다른 하나는 보다 넓은 의미로 유엔 등 국제사회의 질서 대신 힘의 논리를 중시하는 나라들이 해당되고 그 대표적 국가로 미국을 지목한다.

이라크 등이 폭력으로 인권을 훼손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폭력도 미국이 '우리 사람'으로 인정할 땐 면죄부가 주어지며 미국의 명령을 거부하면 불량국가로 낙인찍힌다는 것이 촘스키의 시각이다.

촘스키가 궁극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폭력과 억압이다. 그는 불량국가를 제재하는 수단도 무력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국제사회가 공인한 협의기구 등을 통해 협상과 외교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기본 입장이다.

그러나 저자가 각종 국제분쟁과정, 예컨대 발칸반도.동티모르.콜롬비아.쿠바.이라크 사태 등을 예로 든 이 책에서 그 사태들은 국제기구에 의해 조정된 것이 아니라 미국의 힘에 의해 왜곡되어 궁극적 해결보다는 또 다른 문제의 발생으로 연결된다.

물론 그도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처럼 인권을 억압하는 국가에 대항하기 위한 '인도주의적 개입'의 긍정적 효과를 일부 인정한다. 하지만 그 개입이 정당성을 얻으려면 개입하는 자의 신뢰성이 전제돼야 한다.

그렇다면 미국이 보여준 외교분쟁 해결의 역사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다른 대답이 나올 수 있겠지만 촘스키는 그에 대해 부정적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부정적 유산들을 보면 "미국의 인도주의적 개입의 수법은 직접적 침략, 정부 전복, 테러뿐 아니라 속국들로 하여금 이러한 관행을 계속하도록 지원하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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