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여년 金추기경 모신 김병도신부 회고록 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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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이 땅의 민주화를 가져온 1987년 6월 항쟁의 절정은 시위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이었다.

6월 13일 새벽 당시 성당을 지키던 김수환 추기경은 "학생들을 강제연행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하러 찾아온 안기부(국정원 전신) 고위 간부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학생들을 잡아가려면 나를 밟고 지나가시오."

추기경의 이같은 확고부동한 입장에 전두환 군사정권은 물러섰다. 그 결과가 6.29선언과 민주화다.

김수환 추기경이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지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가장 잘 아는 김병도 신부(66.구의동성당)가 비로소 숨겨진 추기경의 역할을 털어 놓았다.

김신부는 71년부터 80년까지 비서실장으로,85년부터 90년까지는 명동성당 주임신부와 서울대교구 사무처장으로 추기경을 가까이서 모셨다.

그가 최근 40년간의 사제 생활을 정리해 내놓은 회고록 『흘러가는 세월과 함께』(가톨릭출판사.비매품)에서 베일에 감춰져왔던 추기경의 역할을 자세히 밝혔다.

김신부는 서울대교구 제8지구장이며,지난 7월 교황에 의해 '몬시뇰'(고위직 신부)로 임명됐다.

김신부는 직접 곁에서 보았던 추기경의 고뇌와 결단,그리고 당시 발표됐던 성명과 강론 원고 등을 꼼꼼하게 간직했다가 책에 함께 실었다. 가장 극적인 대목은 87년 6월 항쟁을 전후한 상황.

추기경은 시위학생들이 쫓겨 명동성당으로 몰려오자 김신부를 통해 고위 당국자들에게 "절대 강제연행을 허용할 수 없다" "경찰이 진입하면 학생들과 함께 성당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기도하겠다" "학생들이 잡혀가면 전국 신부들이 성당에 모여 기도하겠다"는 강경입장을 거듭 통보했다.

그리고 가톨릭 신자인 이상연 안기부차장이 찾아오자 직접 "나를 밟고 지나가시오"라고 말했다. 더할 수 없는 단호함에 이차장은 '강제연행포기'를 건의했다. 학생들은 성당이 마련해준 버스를 타고 무사히 학교로 돌아갔다. 이후 명동성당은 '민주화의 성지'로 통했다.

또 다른 결정적 대목은 87년 1월에 일어난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추기경은 박군의 죽음이 알려지지마자 '박군의 죽음을 민주제단에 바친다'는 제목의 강론으로 민주화를 강력히 촉구했다. 당시 5공 정부는 박군의 사망사실이 알려지자 서둘러 이를 축소.왜곡해 발표했다.

이후 축소.왜곡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더 큰 국민적 분노를 불러일으킨 것은 그해 5월. 당시 진상을 폭로한 주체인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뒤에도 추기경은 있었다.

진상을 확인한 사제단 신부가 폭로 허용을 요청해오자 추기경은 김신부를 불러 "확인후 사실이면 진상을 밝히라"고 지시했다.추기경은 5월 18일 광주항쟁 희생자 추모미사를 직접 집전한 뒤 그 자리에서 사제단에 진상을 발표하게 했다.

이밖에 71년 '가톨릭 최초의 추기경 성명'등 박정희 정권시절 10월 유신을 전후한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보여준 추기경의 용기도 소개되고 있다.

당시 삼선개헌안을 강압적으로 통과시켜 장기집권의 길을 연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당시 민주당후보와 접전을 치르면서 관권을 동원하는 등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추기경이 비판한 대목이다.

김신부는 서문에서 "서슬 푸른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화에 큰 공헌을 한 추기경의 행적을 글로 남겨야겠다는 결심에서 회고록을 내놓았다"고 밝혔다.

추기경은 직접 쓴 추천사에서 "김신부가 이미 오래 전 암울한 사건 당시 '뒷날 이러한 일들을 밝히기 위해 메모를 해두겠다'며 나에게 허락을 요청했고, 내가 동의했다"고 밝혔다. 02-3436-3090.

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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