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정교하지 못한 대일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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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일본 총리가 7시간30분에 걸친 첫 방한을 마친 지 하루 만인 16일 정부는 대일 문화개방.군사교류 재개방침을 밝혔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항의해 지난 7월 '보복조치'를 내놓은 지 석달 만에 원위치로 돌아간 것이다.

이 과정을 지켜보면 우리 외교가 좀 더 소신있고 정교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외교에서 일본 정부가 갖고 있는 어떤 집요함,고단수도 보였다.

고이즈미 총리는 교과서 문제에 대해 "양국 역사학자나 전문가로 구성된 역사공동연구기구를 설치하자"며 빠져나갔다.

또 서대문독립공원을 찾아서는 일제의 가해행위에 대한 진솔한 사죄보다는 "서로 반성하자"는 말로 얼버무렸다. 이 발언이 문제가 되자 이를 취소했지만 본심은 그대로 보인 것이다.

물론 앞으로 일본측의 대응자세를 지켜봐야 하지만 신사참배, 교과서, 과거사문제 등에 관한 고이즈미 총리의 발언은 '그럴듯 해 보이지만 결국 실현 가능성은 없는' 내용이었다는게 일본문제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결국 독일과는 다른 국가라는 점을 여실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이번에 보여준 외교술은 간단치 않았다. 그들은 어떤 정책을 취하면 한국 정부와 언론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정확히 예상한 것 같다.

일본은 우리 정부가 '국민정서상' 수용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남쿠릴열도에서의 한국 꽁치잡이가 일본의 영토문제를 건드린 것이라며 이를 취소해 줄 것을 우리 정부에 수차례에 걸쳐 요구해왔다.

그러다 일정시점에 이르자 러시아에 강력한 '당근'을 제공,러시아와 제3국 조업금지에 합의하는데 성공하고 자국신문에 이를 흘렸다.

'우리가 한국 정부에 그토록 애원했는데도 들어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는 메시지를 우리 정부에 전달한 셈이다.

그 결과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고이즈미 방한에 대한 한국 내 여론은 꽁치문제로 더욱 악화됐다. 그러나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골치 아픈 '과거사'나 '신사참배'를 희석시킬 수 있는 카드를 얻은 셈이다.

냉철한 인식과 항의를 받더라도 국익을 위해 용기있게 대처하는 외교의 모습을 보고싶다.

이영종 통일외교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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