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또 다른 규제 집단소송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지난 주말 법무부와 재정경제부가 법률 전문가들과의 공동작업을 거쳐 발표한 '증권관련 집단소송법' 시안은 이른바 '이용호(李容湖)게이트'를 계기로 고조된 주가 조작 단속 요구와 맞물려 추진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제도 도입의 취지가 선의의 주식 투자자들을 보호하면서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되 소송 남발을 막자는 것이라면 적용 대상부터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시안은 허위공시.부실회계는 자산규모 2조원 이상 대기업,주가 조작은 증권시장에 상장.등록된 모든 기업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런 규정대로라면 사실상 모든 대기업이 소송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오랫동안 지속돼온 분식회계 관행의 유산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내년부터 부실 회계는 무조건 소송 대상이 된다면 온전할 기업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과거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면서 가.차명 예금에 대해 일정기간 처벌을 면제해준 '도강(渡江)'정책을 실시했듯 집단소송제 도입에도 유사한 보완조치가 검토돼야 한다.

증시의 모든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주가 조작의 경우 성격상 주가 변동이 심할 수밖에 없는 신기술.신사업 분야의 기업들이 타깃이 될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경우 정보통신.바이오기술 등 경제의 장래를 위해 필요한 기업들이 소송 남발로 타격을 받을 우려가 크다.

따라서 집단소송제를 굳이 도입하려면 적용 범위와 요건부터 분명히 규정해야 한다. 공정거래법의 적용 대상 재벌은 자산규모 3조원 이상으로 한다면서 집단소송제 적용 대상 대기업은 2조원 이상으로 설정하는 식의 논리나 일관성 없는 기준도 재고돼야 할 것이다. 정부와 정치권은 법 제정 및 시행시기까지 충분한 의견 수렴과 보완에 힘써야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