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운 장편 '재벌에 곡한다' 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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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이 땅의 경제를 쥐락펴락하던 재벌이 무한 경쟁시대라는 복병을 만나 상처 입고 비틀거릴 때, 나는 그들의 몰락이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내 혈족 서넛이 실업자가 됐고, 가까운 벗 꽤 여럿이 수십년 몸 담았던 직장을 잃었다. 나는 이 소설 속에 한바탕 요란한 꿈 같은 어느 재벌을 온전히 그려보려 했다. 소설을 쓰는 동안 사회가 매도하는 재벌의 경영방식이 재벌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중견작가 최용운(崔龍雲.47.사진)씨가 세계를 경영했던 한 재벌의 흥망사를 다룬 장편소설 『재벌에 곡(哭)한다』(문이당.8천원)를 최근 펴냈다.

198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최씨는 장편 『그곳엔 까만 목련이 핀다』 등을 펴내며 탄광촌 밑바닥 인생을 배경으로 한 서민들의 진솔한 삶을 따뜻하게, 그리고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그려오고 있다는 평을 받는 작가다.

『재벌에 곡한다』는 오늘의 한국 경제 현실을 토대로 재벌 기업의 흥망사를 소설화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자 이야기를 이끄는 화자(話者)는 25년 동안 재벌 총수를 '주군'처럼 모셔온 비서실 사장이다.

때문에 재벌의 편에 서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도 한편으론 잘못된 기업문화, 정경유착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어 일단은 흥미롭게 읽힌다.

그러면서 작가는 60년대 경제개발과 함께 한국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재벌은 과연 복마전의 온상인가, 아니면 정치 세력의 희생양인가를 묻고 있다.

소설은 지금은 몰락해 가는 육대주 그룹의 비서실 사장이었던 주인공이 그룹 총수를 보좌하던 지난 25년을 회상하면서 시작된다.

1973년 시작된 제1차 석유파동을 육대주 그룹은 오히려 기회로 생각하고 수출을 목표로 경영다각화를 꾀한다. 정부도 기업 팽창이 부를 창출하고 가난을 몰아낼 수 있다는 판단 아래 문어발식 확장을 적극 돕는다.

또 박정희 정권의 중화학공업 정책과 방위산업은 육대주 그룹과 국가의 운명을 하나로 만든다.

시대는 육대주 그룹 편이었던 것이다. 해외에서 벌이는 대형 공사현장이 세계적으로 매스컴을 타고 외국의 원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그룹 총수의 사진이 전파를 타면서 육대주의 이미지는 나날이 향상 되어 갔다.

그러나 신군부가 들어선 이후 성장 위주 정책을 버리고 중화학공업에 대한 투자조정 작업이 진행되면서 육대주는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룹 몰락의 소문이 여론에 퍼지면서 결국 총수는 회장직을 내놓고 떠난다는 게 이 작품의 기둥 줄거리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재벌은 몰락으로 단죄를 받았지만 재벌을 그렇게 내몬 정치인과 관료들은 여전히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환기시키고 있다.

재벌을 단죄하면서 다국적 기업의 한국 재벌에 대한 보이지 않는 음해와 그 음해를 현실화하며 재벌에 제재를 가하는 정치인과 경제관료들에게도 비판의 화살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을 읽어본 소설가 이문열씨는 "세상이 모두 한쪽에 몰려 재벌의 일면만 바라보며 비판하고 있을 때 세상이 보지 못하는 쪽을 말하고 있는, 용기 있고 재미있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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