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황순원문학상' 수상소감] 황순원상 박완서 소설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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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은 내게 과람하여 비켜갈 궁리도 여러번 해보았지만 황순원 선생님을 기리는 마음에 거짓이 없는지라 감히 사양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분 생전에 한 번이라도 가까이 모시고 훈도에 접할 기회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 분께 저서를 보내면 아무리 까마득한 후배의 졸저라 해도 친히 전화로 격려의 말씀을 주신다는 아름다운 일화를 알게 된 것도 그 분이 돌아가신 후였다.

그 분한테 내 책을 보내드린 일이 없다는 걸 후회해 봐야 이미 돌이킬수 없는 일이었다.그러나 나에게도 돌아가신 분이 말씀을 걸어오신 것 같은 적이 있었다.

장마가 지루하게 계속되던 지난 여름 어느 날,혼자 집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그 적막감을 달래기 위해 텔레비전을 켰더니 옛날 흑백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50년대께로 짐작되는 우리 산천과 농가의 모습이 하도 정겨워 무슨 영화일까 하는 궁금증도 잊고 홀린듯이 바라보고 있는데 김진규가 문희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작녀, 오작녀 하고. 오작녀란 흔한 이름이 아니다. 담박 아, 저건 '카인의 후예'로구나 알 수가 있었다.

오작녀란 그 특이한 이름이 내 마음에 일으킨 그리움과 울렁거림의 파문에 대해 난 아직도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다.

나는 갈증처럼 다급하게 서가에서 '카인의 후예'를 찾았고, 드디어 오래된 책이 손에 잡혔다.

나는 마치 연인들이 사랑을 하기 위해 어둑신한 골방을 찾듯이 집안에서 가장 은밀하고 편안한 자리를 찾아 그 오래된 책과의 사랑을 시작했다. 공들인 품격있는 문장을 오래된 종이책으로 읽는 맛은 감미롭고도 쓸쓸했다. 그때 나는 왠지 글의 참 맛과 오래된 종이의 촉감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또한 나의 몰입은 여러 겹의 시간 속으로의 잠입이기도 했다. 그 책과 다시 만난 현재 시간으로부터, 처음 만났을 때,작가가 그 책을 쓴 시간, 작가가 꼼꼼히 증언하고자 한 그 이전의 시간까지 여러 겹의 시간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면서 문득 이런 느낌은 종이책 아니면 맛볼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이책이라고 해서 종이에 글자가 찍힌 모든 인쇄물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구식의 낡은 생각이겠지만, 종이에 자기 글이 자기 이름을 달고 인쇄된다는 걸삼가 두려워하며 책임감을 느낀 시대의 글쓰기를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종이책이 별안간 그렇게 귀하게 여겨졌던 것은 종이책의 사라져감에 대한, 혹은 내가 겁없이 낸 책 중 내가 죽은 후에도 남아서 누군가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책이 단 한권도 있을 것 같지 않은 불길하고 쓸쓸한 예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문학의 위기가 거론되는 빈도가 점점 더 잦아지고,문학이 대단한 것인줄 알고 시작했고, 그것 밖엔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는 나같은 별수없는 작가도 종이책은 곧 사라지고 말지 싶은 방정맞은 예감으로 자주 울적해지는 작금, 오히려 문학상은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전성기를 맞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현상은 꼭 있어야할 것, 우리 모두가 그것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닌 게 돼버릴 것 같은 소중한 것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애타는 환기(喚起)가 아닐까.

나는 어차피 종이책과 운명을 같이 할 사람이다. 내 예감이 틀리고, 이런 착한 불러일으킴이 이루어지기를 어찌 소망하지 않겠는가.

한국문단과 독자로부터 받아온 넘치는 사랑과 꾸준한 관심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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