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노동존중의 사고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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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주 5일 근무제 도입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물론 노동시간제도는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주 5일이든 주 6일이든 노동을 할 때 어떠한 마음자세로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하는가다.

***어떤 가치관으로 일하나

본래 직업노동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생계유지 수단으로서의 노동'이다. 생활소득을 벌기 위한 직업노동이다. 이러한 의미의 노동은 노동 그 자체가 목적이고 즐거움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이다. 반면 휴가와 휴식이 즐거움이다. 따라서 가능한 노동을 줄이려 하고 휴식을 늘리려 한다.

다른 하나는 '자기실현으로서의 노동'이다. 삶의 의미로서 내지는 삶의 목적으로서의 직업이고 노동이다. 직업노동이 곧 가치이고 보람이며 즐거움이다. 따라서 가능한 노동을 열심히 하려 한다. 휴식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보다 가치있는 노동을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

그런데 오늘날 선진국들은 생계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목표 내지 의미로서의 노동이란 직업윤리와 노동철학이 국민 사이에 뿌리깊게 박혀 있는 나라들이다. 이들 나라의 대부분 국민에게는 직업노동이 삶의 목적과 삶의 가치 그 자체가 돼 있다. 어떻게 해 그렇게 되었을까?

종교와 교육의 역할이 컸다. 구미의 경우에는 프로테스탄티즘의 기여가 컸다. 주지하듯이 루터는 세속적 노동과 직업에 적극적으로 신앙적 의미를 부여했다. 노동이나 직업을 신으로부터 주어진 소명으로 보았다.

모든 직업은 신의 뜻이며 이웃에 대한 사랑의 구체적 표현으로 보았다. 칼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직업노동을 신의 영광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한 종교행위로 보았다.

특히 사람들은 엄격하고 금욕적인 직업노동을 통해서만 종교적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한마디로 세속적 직업노동은 종교적 구원을 성취하고 확인하는 길이었고, 그러한 의미에서 신앙생활 그 자체였다.

20세기 들어 후진국에서 선진국이 된 유일한 나라인 일본의 경우도 종교의 역할은 중요했다. 스즈키 쇼산(鈴木正三.1579~1655)은 특히 우주 일체의 존재를 그대로 부처의 분신(分身)으로 보는 대승불교의 화엄사상에 기초해 일체의 직업노동에는 부처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다고 보았다.

각종 직업 노동이 그대로 부처의 행이라는 것이다(勞動卽佛行). 따라서 모든 직업은 신성하고 평등하며 중생을 이롭게 하는 부처의 자기실현이 된다. 그런데 중생이 곧 부처이므로 직업노동은 그대로 중생의 자기수양, 자기완성의 길이 된다. 결국 농민이 땀 흘려 농사를 짓고 상인이 정직하게 장사를 하는 것이 그대로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의 행이요, 깨달음과 성불의 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 역사 속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삶의 모습은 두 가지가 있었던 것 같다. 하나는 지배 엘리트 철학으로서의 '입신출세(立身出世)'이고 다른 하나는 억압된 민중의 감상으로서의 '신선(神仙)같은 삶'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노동존중적이거나 노동친화적인 것은 아니었다.

***직업 윤리 바로잡았으면

'입신출세론'에는 땀 흘리는 육체노동을 천시하는 측면이 강했고 '신선론'에는 일하지 않고 먹고 노는 것을 예찬하는 측면이 강했다. 기본적으로 노동을 천시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기피하려 했다. 이러한 가치관 속에서 과연 산업의 국제경쟁력 제고가, 그리고 기술입국이 가능하겠는가?

우리는 이 점을 고쳐야 한다. 우리가 진정 선진국 국민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의 직업윤리와 노동철학을 바르게 세워야 한다. 노동시간 문제를 논하기 이전에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우리는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는 올라 올 수 있어도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는 올라설 수 없다.

직업노동의 가치에 대해 그동안 우리나라의 종교계와 교육계 지도자들은 과연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 왔는지 모두가 함께 반성해 볼 일이다. 그리고 시간이 걸려도 기초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朴世逸(서울대 교수 법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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