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9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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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92. 방대한 장서

참선을 강조하느라 늘 "책 읽지 말라"고 가르치던 성철 스님 본인은 정작 책을 아끼는 장서가이자 독서광이었다. 성철 스님이 거처를 옮길 때마다 한바탕 치러야 하는 큰 일이 수천 권에 이르는 장서(藏書)를 옮기는 것이다. 백련암에 자리 잡고서는 아예 '장경각(藏經閣)'이란 별도의 건물을 지어 서고로 사용해야 할 정도로 책이 많았고, 성철 스님은 그 어느 한 권도 소홀히 대하지 않았다.

성철 스님이 대규모의 장서를 갖게 된 것은 1947년 봉암사 결사를 시작하기 직전 경남 양산 내원사에 머물 무렵. 어느 날 성철 스님과 절친한 도반(道伴.구도행의 동반자) 청담 스님이 해인사에서 보내온 편지가 도착했다.

"서울 사는 거사(居士.남자 불교신도의 존칭)가 한 분 있는데 경전에도 밝고, 어록에도 밝다고 합니다. 그 거사가 '나보다 불전(佛典)실력이 나은 스님이 오면 경전과 어록들을 다 주겠다'고 한다니 스님이 나와 함께 가서 그를 한번 만나보시지요."

얘긴즉슨 김병용이라는 거사가 대장경뿐 아니라 중국에서 발간된 선종 어록 등 3천여권의 희귀한 불교관계 서적, 그리고 일부 목판본까지 소장하고 있는데 기증받을 고승(高僧)을 찾고있다는 것이다. 당시 성철 스님과 봉암사 결사를 준비하던 도선사 선원장 도우(道雨)스님이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전후사정.

"성철스님과 청담스님이 대승사에서 함께 수행할 때 주지가 김낙순 스님이었어요. 선방 앞의 큰 나무를 베어넘기는 통에 주지의 속을 끓이기는 했지만, 두 분의 정진과 높은 학식은 김낙순 스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나 봅니다. 김병용 거사라는 분이 바로 김낙순 스님의 친척인데, 金거사가 책을 시주받을 만한 스님을 물색해달라고 부탁을 한 거예요. 그래서 김낙순 스님이 청담 스님에게 연락했고, 청담 스님은 자신보다 성철 스님이 낫겠다고 생각해 같이 서울로 가자고 편지를 보내온 것입니다."

김병용 거사는 충북 충주에 살던 천석꾼. 그는 불교에 심취했던 아버지로부터 불교관련 서적을 물려받았다. 워낙 귀하고 어려운 책이라 자신이 간직하기 보다 이를 잘 활용할 스님을 찾아 시주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金거사는 속내를 감추고 이 절 저 절 참배하며 마땅한 스님을 찾았다. 틈틈이 불교에 대한 문답을 하기도 했다. 몇 년을 다녔지만 마땅한 스님을 못찾던 중 성철.청담 스님을 소개받게된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총림(叢林.교육과 수행 등 기능을 모두 갖춘 큰 절)을 만들어 운영하려면 불교 서적이 꼭 필요하다"는 판단, "세속에 그렇게 해박한 거사가 있나"하는 호기심, 나아가 "얼마나 많은 경전과 어록을 가지고 있을까"하는 궁금증까지 더해 성철스님은 당장 청담 스님을 만나 서울로 올라갔다. 김거사와 청담.성철 스님의 삼자대면 상황에 대해 성철 스님이 들려준 얘기.

"金거사가 보기 드물게 경전을 많이 읽었고, 특히 반야경전에 달통했더구만. 그 사람이 한참을 이야기하는데, 가만 듣다보니 유식학(唯識學.불교적 인식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해! 그래서 내가 다 듣고 말했제.'거사가 아는 불교 이야기는 어지간히 했소?'하니 '그렇습니다'카는 거라. 내 차례다 싶어 유식학에 대해 한참 얘기했제. 자기가 모르는 유식학을 강론하니 귀가 번쩍 뜨였던 모양이라."

성철 스님의 얘기를 다 듣고 난 金거사가 만면의 웃음으로 화답했다.

"내가 선대로부터 물려받고, 또 지금까지 모으고 간직해온 귀한 책들을 받아갈만한 스님이 없으면 어쩔까 큰 걱정을 하며 살았는데, 오늘 이렇게 스님을 만나서 내 소원을 풀었습니다. 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이 모든 것을 스님께 드릴 터이니 언제든지 가져가십시오."

한 차례의 만남으로 모든 얘기가 끝났다. 운반수단이 없던 시절이라 방대한 장서를 옮기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도우 스님이 자운 스님에게서 운반비를 지원받아 결사예정지인 봉암사로 옮겼다. 이후 성철 스님은 항상 장서를 안고 살았다.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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