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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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세상은 아름다운 거야. 하지만 그들도 '그렇다'고 수긍할까 ? 비록 지금 이 순간의 세상이 아름답다고 노래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바닥에 털썩 주저앉을 만큼 나약하진 않지. 스무살, 그녀들은.

여상을 졸업하고 세상에 내던져진 세 여자. 착한 태희(배두나)는 봉사활동에서 만난 뇌성마비 시인을 좋아해 고민에 빠지고, 혜주(이요원)는 증권회사에 입사해 커리어 우먼으로 성공을 꿈꾼다. 어려운 형편의 지영(옥지영)도 텍스타일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하지만 세상은 태희의 순수한 사랑과 고졸의 한계를 뛰어 넘어려는 혜주의 야망을 그대로 받아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판잣집에서 병든 조부모를 모시고 사는 지영은 하루하루 지내기조차 힘겹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교복을 벗고 세상으로 떠난 스무살 여자들의 속내를 섬세하고 솔직하게 그린다. 화려한 압구정동이 아니라 인천의 후락한 공단과 동대문 시장이 배경이지만 전혀 궁색하거나 험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몇몇 일상의 정밀한 포착은 문득 잊고 지낸 주변의 삶을 하나하나 들춰내는 묘한 힘을 발휘한다.

더구나 스무살 여자에게서 뺄 수 없을 듯한 섹스라는 요소를 일부러 외면한 여성감독 정재은의 선택도 탁월해 보인다. 이런 미덕들로 인해 영화가 말하는 스무살 여자들의 고민은 싱싱한 현실감 그 자체로 다가온다.

이 영화가 스무살을 말하고, 또 스무살 삶 속에 고양이를 개입시킨 이유는 뭘까. '고양이를 부탁해'가 데뷔작인 정감독은 여자로 세상과 처음 마주치는 그녀들의 속내가 내내 궁금했기에 이야기하고 싶었고, 집과 사회의 경계선에 있는 스무살이란 나이는 애완 동물과 야생 동물 사이의 경계에 있는 고양이와 닮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영화에서 고양이는 여자 주인공들의 분신이자 주인공들을 엮어주는 연결 고리가 된다.

주제에서 디테일까지 분명한 색깔을 내고 있는 정감독은 할머니가 이가 성치 않아 총각 김치를 끊어 먹지 못하자 대뜸 짜증을 부리는 지영의 표정이나 동대문 시장에서 친구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셔츠를 살까말까 고민하는 혜주의 눈빛에서 스무살의 철없음과 그 속에 내재한 고통.번민을 한꺼번에 표현해내는 비범한 재능을 지녔다.

하지만 에피소드들의 신선함에 비해 극적인 굴곡이 없는 영화는 관객이 다가오기를 기다릴 뿐 빨아들이려고 노력하지 않는 '게으름'을 피운다. 웃겨 주고 울려 주려는 기교를 배제한 탓인지 이성적으로는 감독에 공감하는데도 불구하고 다소 심심한 느낌은 어쩔 수 없다. 13일 개봉.

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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